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study discusses the publication of the Records of Visiting Ryukyu(使琉球錄) in Kapjin (甲辰字) copper type and the interest in Ryukyu of the 16th century Chosŏn. Records was written by Ming envoy Chen Kan(陳侃) and described his impressions of the Ryukyu Kingdom, or present-day Okinawa Prefecture, and was edited and published in Chosŏn. In 1534, Ming China sent Chen Kan as chief envoy to invest Shousei(尙淸) as King of Ryukyu, and wrote Records upon his return from traveling for about four months in Ryukyu. It was published during the reign era of the Jiajing(嘉靖) Emperor, and thus was called the Jiajing edition of the Records of Visiting Ryukyu. This text then moved to Chosŏn, and a Chosŏn edition of the text was made. The Chosŏn edition was published in Kapjin copper type during the end of King Chungjong’s reign until King Myŏngjong’s reign as one volume and two books. However, it was stolen by the Japanese during the Imjin War(壬辰倭亂) and is currently held by the National Diet Library in Japan. Although it omits much of the information contained in the Jiajing edition, the omitted content shows that Chosŏn was more interested in Ryukyu’s actual state of affairs rather than its relationship with Ming China. A text from a similar period, Ŏ Suk-kwŏn’s Paekwanjabgi(稗官雜記), also quotes from Chen Kan’s Records, particularly that of the content omitted in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both writings therefore complement each other. In addition, Paekwanjabgi also takes an interest in Ryukyu itself. The period in which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and Ŏ Suk-kwŏn’s Paekwanjabgi were produced was when Chosŏn had shifted from direct to indirect relations with Ryukyu. After 1519, Ryukyu envoys no longer visited Chosŏn and the Chosŏn court was suspicious of this change in relations. King Chungjong became interested in their reasons for not visiting Chosŏn and in the distance from Chosŏn to Ryukyu. Moreover, the issue of repatriating Ryukyuan castaways that landed in Chosŏn and vice versa also came to the fore. Chosŏn became interested in the actual location of Ryukyu and the methods of transporting these castaways because repatriations took place through either China or Japan. In sum, the publication of the Chosŏn edition of Records shows how Chosŏn was interested in Ryukyu.
한국어
본고에서는 갑진자 동활자로 조선에서 간행된 『사유구록(使琉球錄)』을 소개하고 이 텍스트가 간행되었던 16세기에 조선이 유구(琉球)에 대해 관심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살폈다. 『사유구록』이란 현재의 오키나와현(沖縄縣)에 해당하는 옛 유구왕국(琉球王國)을 사신으로서 방문하고 남긴 기록을 말한다. 본고의 대상이 되는 『사유구록』은 조선인이 집필한 것이 아닌, 명나라인 진간(陳侃)이 저술한 것을 조선에서 편집 간행한 것이다. 1534년 쇼세이(尙淸)를 유구국 중산왕으로 책봉하기 위한 명나라 책봉사(冊封使)가 유구를 향했다. 진간은 이 사절단의 정사(正使)로서 사행에 임했다. 그리고 약 4개월 간의 유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유구의 실정을 담은 『사유구록』을 저술했다. 이것은 가정(嘉靖) 연간에 간행된 텍스트라고 하여 가정본 『사유구록』이라고 칭해진다. 이 텍스트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조선본 『사유구록』으로 편집되었다. 조선본 『사유구록』은 갑진자 동활자로 중종 말기부터 명종조 시기에 간행되었으며, 2권1책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약탈되어 현재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은 가정본 『사유구록』에 비해 생략이 많은데, 생략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이 명과 유구의 관계보다는 ‘유구’의 실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텍스트인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진간의 『사유구록』이 인용되어 있다. 조선본 『사유구록』에 생략된 부분이 인용되어 있어 『패관잡기』와 조선본 『사유구록』 사이의 상호 보완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패관잡기』의 기록에서도 ‘유구’ 자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본 『사유구록』과 어숙권의 『패관잡기』가 작성되던 무렵은 조선과 유구의 직접적이던 교린 관계가 간접적인 방법으로 변화한 직후였다. 종종 조선을 내방하던 유구의 사신들이 1519년 이후 더 이상 조선을 방문하지 않았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중종(中宗)은 그들이 오지 않는 연유와 유구까지의 육해상 거리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에 표착한 유구 표류민과 유구에 표착한 조선 표류민의 송환 문제도 화제로 부상했다. 중국 또는 일본을 통한 송환이라는 두 가지 경로 사이에서의 유구의 실제 위치와 이동 방법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시기 조선본 사유구록이 간행된 것은 조선의 유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조선본 『사유구록(使琉球錄)』의 서지와 구성
3. 동시대 『패관잡기(稗官雜記)』속의 유구 기록
4. 16세기 유구에 대한 조선의 관심
5. 마치며
참고문헌
日文抄録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