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Sending Jangagwon’s Boy Dancers and Female Entertainers to Private Homes : A Focus on Cases of Jeong Won-yong’s Hoebang
초록
영어
This study begins with the question of what dances were performed in the Sa-ak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Sa-ak (賜樂) consisted of a director, musicians, female entertainers, boy dancers, and a Cheoyong masked dance group. The research objective is Jeongsanggonhoenangilok, which was written to celebrate Hoebang (回榜)’s 60th anniversary of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by Jeong Won-yong(1783- 1873). The Joseon wangjo sillok (朝鮮王朝實錄) and Akhakgwebeom (樂學軌範) were also sources of background material, consisting of official records and literary works, that were subject to review. In terms of the rites of the Hoebang, on January 1, 1862, the king gave orders. In addition to feasting by the royal family, the government allowed citizens to also participate in festivals, many of which were held over the course of two months. Relative to the Sa-ak, the king established the first degree of Sa-ak, which consisted of a total of 52 people: 1 director, 36 musicians, 10 boy dancers, and 5 Cheoyong masked dancers. They performed for two months. In terms of the performances, the repertoires of the boy dancers were not recorded and remain unknown. While it was performed leisurely, it gave a feeling of flourishing and colorful. The female entertainers performed seven kinds of dances along with the Jangagwon orchestra: Cheoyong masked dance, sword dance, drum dance, pogulak (dancing ball into hole), seonyulak (dancing to play on the ship), and hyangbal heonseondo (dancing to give a long life peach). These repertoires were the most popular forms of jeongjae (呈才) in the late Joseon court. The Sa-ak was performed as part of a private feast. “Sa-ak” is an important keyword for understanding the culture of Korean dancing, because it spreads as “Sa-ak” in private space, and has the character of cultural circulation in which the enjoyment of royal court dance extends to individuals.
한국어
이 글은 임금이 개인에게 내려주는 가무악인 사악(賜樂)에 어떤 춤이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은 회방(回榜)에 관해 전하는 기록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친척 여성이 쓴 한글가사인 <뎡상공 회방긔록>과 정원용의 일기인 『경산일기』를 토대로 회방연 의례와 관련된 사악, 그리고 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첫 단계로, 회방연 의례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았다. 경산 정원용의 회방연은 1862년 1월 1일에 철종이 내린 전교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회방과 관련된 궁궐 행차와 집안 잔치, 묘소에까지 회방 관련 의례가 이어졌고, 준비부터 회방 행사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는 세 달이 걸릴 정도였다. 두 번째 단계로, 회방연 사악의 면모를 파악하였다. 정원용에게 내려진 1등 사악은 전악(典樂) 1명, 악공 36명, 무동 10명, 오방무(五方舞) 5명으로 구성되어, 총 52명이었다. 이러한 구성은 『육전조례』의 1등 사악이 악사 1명, 전악 2명, 악공 20명, 무동 10명, 처용무 5명, 색리 1명으로 구성되어, 총 39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악공의 수가 더 많았다. 1등 사악으로 보내진 공연단은 예행연습을 시작으로, 두 차례에 걸친 대궐 행차와 팔순 생일잔치, 마을에 음식 나눔과, 묘소의 연회에서도 공연활동을 수행하였다. 1등 사악의 공연활동 기간은 두 달에 이르렀다. 세 번째 단계로, 회방연 사악으로 공연된 춤을 살펴보았다. <뎡상공 회방긔록>에 따르면, 10명의 무동이 춤을 추었으나, 구체적인 춤 종목은 알기 어렵다. 기녀들은 회방연에서 장악원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기녀들이 정원용의 집에서 공연한 춤은 처용무․초무․검무․무고․선유락․포구락․향발․헌선도 등 8종목의 정재였다. 회방연 사악으로 공연되었던 춤 종목은 조선후기 궁중에서도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정재임이 확인되었다. 정원용 회방연의 사악을 한국 공연예술사에서 주목해야할 이유는 궁중의 문화가 개인 집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궁중공간에서 공적인 성격을 띤 악무는 개인공간에서 사적인 성격을 띤 잔치에서도 공연되었다. 이처럼 중앙의 ‘악’이 확산되고, 궁중악무의 향유층이 개인과 문중까지 확대되는 문화적 유통의 성격을 지니므로 ‘사악’은 조선의 춤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즉, 정재가 궁중에서 왕실을 위한 춤과 지방 관아에서 행사를 위한 연향 춤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공연되고 향유되었던 춤이라는 정재의 존재 방식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본 연구의 의미라 하겠다.
목차
Ⅰ. 머리말: 사악(賜樂)에 어떤 춤이 존재했을까?
Ⅱ. 회방 의례와 사악(賜樂)
1. 정원용의 회방(回榜) 의례
2. 회방연 사악(賜樂)
Ⅲ. <뎡상공 회방긔록>의 춤
1. 무동의 춤
2. 기녀의 춤
Ⅳ. 맺음말: 회방연 사악의 춤, 그 문화적 의미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