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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享三(1746)年『大慶参判使記録』 ─ 吉宗譲職から大慶参判使茶礼前日まで ─

원문정보

In 1746 “Taikei sanhanshi Records” ─ From the abdication of the throne untill before of Tea Ceremony ─

연향삼(1746)년『대경참판사기록』 ─ 길종양직から대경참판사차례전일まで ─

田阪正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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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1746, Delegation from Chosen to Japan was dispatched for celebraton of Ieshige’s general accession. This Delegation was ended a schedule calmly compared with other delegations. In this report, I considered “Taikei sanhanshi Records” which could not be considered until now. And I try to understand meaning of existence of Records like this. In 1745 September 1, Yoshimune retired and Ieshige acceded to Shogunate. The process until Tsushima clan receives this news was not smooth. Many days were needed from appointment for a delegation to Chosen to departure from Tsushima clan. And there were intense negotiations with a delegation and Chosen after they arrived in Pusan at last. We can find several articles about that. Those are records of negotiations through four official interpreters with Dongrai or Chosen. I hope to make the form that the Tsushima clan which struggled between the Shogunate and Chosen plays an active part clearly through these work.

한국어

무진년신사는 吉宗(요시무네)가 家重(이에시게)에 장군직을 양도하여 은퇴하고 나서 家重가 장군직에 즉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 된 사절단이다. 다른 때의 통신사와 비교하면 큰 사건 없이 평온한 가운데 여정을 마친 통신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언급 되지 않은 󰡔大慶参判使記録(대경참판사기록)󰡕을 고찰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는 大慶参判使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대마번에 전해져 온 종가문서 중에서는 매일기로 불리운 기록물이 종래 고찰 대상이 되어 왔지만 매일기와 달리 작성 된 이러한 기록물의 존재의미를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이번에 󰡔대경참판사기록󰡕을 고찰하고자 한다. 延享2(1745)년 9월 1일에 吉宗(요시무네)의 은퇴와 家重 즉위가 발표 되지만, 이 소식이 대마번에 까지 전달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참판사의 정관, 都船主(도선주), 그리고 封進(봉진)을 비롯한 인원이 임명되어, 상선, 출범에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바다를 건너 부산에 도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드디어 부산 왜관에 도착하고 나서 전개되는 조선측, 구체적으로는 두 사람의 차비관과 훈도 그리고 별차, 이른바 四訳(사역, 네 명의 역관)을 통하여 조선 혹은 동래부와의 교섭은 상호 위신이 걸린 격한 장면도 기록한다. 이러한 사료의 고찰 작업을 통하여 막부와 조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대마도번의 활약상을 밝히는 시도로 삼고 싶다.

일본어

延享度通信使(韓国語では戊辰年信使)は、吉宗が家重に将軍職を譲って隠居したことにより家重が将軍職に就いたことを祝うために派遣された使節である。他の通信使と比べると大きな事件もなく平穏なうちに行程を終えた通信使であるとされる。本稿では、これまで言及されることのなかった『大慶参判使記録』を丁寧に読むことにより、あまり知られていなかった大慶参判使について考察を試みる。と同時に、対馬藩に伝わった宗家文書のうち毎日記といわれるものが従来考察の対象となってきたが、毎日記とは異なった目的を持って作成されるこうした記録物の存在意味を考えるためにも󰡔大慶参判使記録󰡕の考察を試みるものである。 延享二(1745)年九月朔日に吉宗の隠居と家重への代替が公表されるが、その知らせが対馬府中藩に届く過程においても、その伝達は容易なものではなかった。参判使の正官、都船主、そして封進をはじめ使節の一行が任命され、上船、出帆にも多くの日数を要し、釜山への渡海も容易なものではなかった。いよいよ釜山の倭館に到着してから展開する朝鮮側、具体的には二人の差備官に訓導、別差という、いわゆる四訳を通しての朝鮮あるいは東萊府との交渉は、相互の威信をかけた激しい場面も記録されている。こうした作業を重ねることにより、幕府と朝鮮との間に立って奮闘する対馬藩の立ち振舞いを解明していく試みとしたい。

목차

<要旨>
 Ⅰ. はじめに
 Ⅱ. 吉宗譲職の知らせ
 Ⅲ. 遜位・大慶参判使の名称変更
 Ⅳ. 朝鮮方毎日記と大慶参判使記録
 Ⅴ. 大慶参判使出帆から釜山着まで
 Ⅵ. 四訳との対面と茶礼前日まで
 Ⅶ. おわりに
 参考文献
 <要旨>

저자정보

  • 田阪正則 鮮文大学校 国語国文学科 副教授, 比較文学専攻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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