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article aims to review the background of the composition of Yeonhyengjegok in relation to the political situation and musical policy in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to analyze the theme of the work. King Sejong inherited the throne from King Taejong shortly after the outbreak of Prince Yangnyeong. Even though Yangnyeong was defeated into the province, he sequentially caused problems; however, King Sejong embraced Yangnyeong in a spirit of brotherhood, and even called him a court and gave banquets. Particularly, in 1432 when Yeonhyengjegok was approved, the scale of the banquet was greatly increased. Because it was difficult to prevent King Sejong’s will from giving the banquet for Prince Yangnyeong, the servants decided to compose a song to be heard at the banquet, and expressed in it that there was an obligation to keep between the king and his brothers. In addition, Yeonhyengjegok is closely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Aak(雅樂), which was being composed around 1432. In verses from 1 to 3 of Yeonhyengjegok, the fraternal relationship among brothers has been represented in succession from childhood through the school year to the adulthood. Verse 4 clearly articulates the key connotations that the king and his servants shall keep their ministry even if they are brothers. Verse 5 summarizes the scene in which the above ideal is achieved and concludes the whole work with the hope of the longevity of the king and the prosperity of the nation. In this manner, Yeonhyengjegok appears to praise King Sejong on the surface, demonstrating the brotherhood between King Sejong and Prince Yangnyeong. However, it, in fact, expressed the desirable relationship and conduct between the king and his brothers, and taught the lesson that they must obey their duties in the future. Yeonhyengjegok was continuously used even after the reign of King Sejong mainly because the contents of the work can also give lessons to later kings.
한국어
본고에서는 경기체가계 악장 <연형제곡>의 제작 배경을 세종대의 정치적 상황 및 악장 정비 시책과 연관 지어 검토하고 작품의 지향과 특징을 분석한 후, 이 작품이 세종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행될 수 있었던 계기를 논의하였다. 세종은 양녕대군의 폐세자 조치 직후 태종의 급작스러운 선위를 통해 즉위하였다. 양녕은 지방으로 방축된 이후에도 물의를 일으켜 문제가 되었으나 세종은 ‘사람의 지극한 정[人之至情]’과 ‘형제의 도리[兄弟之道]’를 내세워 양녕을 비호하였으며, 그를 궁중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특히 <연형제곡>이 악부에 등재된 재위14년에 이르러서는 연회의 규모가 대폭 확대된 상황이 발견된다. 연회를 지속하려는 세종의 뜻을 사실상 막기 어렵게 되자, 신료들은 불가항력으로 연회를 받아들이되 연회에서 부를 악장을 별도로 마련하여 그 속에 형제이자 군신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표명함으로써 세종과 양녕대군 모두 삼가는 마음을 지니도록 유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연형제곡>은 세종14년 무렵에 조정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회례아악곡의 제정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당시 이 작업에는 상당한 인력과 공력이 소요되었으며, 관련 논의가 1년 반가량 꾸준히 이어졌다. 바로 그 시기에 세종은 양녕대군을 궁중에 소환하여 수차 설연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양녕을 만날 때에도 역시 연회가 동반되었으므로 기왕 회례악을 제작하는 계제에 과외로 양녕과의 연회로만 쓰임이 특화된 <연형제곡>을 제진하였던 상황이 구성된다. 한편, 회례악에 아악만을 전용해서는 안 된다는 세종의 평소 지침에 따라 회례악은 결국 아악, 당악, 속악이 혼재된 형식으로 제작되었거니와, 속악만을 쓰는 <연형제곡>과 같은 회례악장이 독자적으로 제진된 것도 그와 같은 세종의 방침이 고려된 조치로 보인다. <연형제곡>의 제작 배경을 다룬 위와 같은 논의의 설득력은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 <연형제곡>의 제1∼3장에서는 형제간의 우애로운 관계가 유년기부터 시작되어 취학기를 거쳐 성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광경을 순차적으로 그렸으나, 3장에서는 자칫 반목하고 소원해 질 수 있는 형제간의 관계를 다잡고 천륜을 되새겨야 한다는 규계를 일부 표출하였다. 이어지는 제4장이야말로 <연형제곡>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자 작품의 제작 배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라 할 만하다. 비록 형제지간일지라도 임금과 신하의 직분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핵심적 언질을 제4장에서 명확히 표출한 것이다. 제5장은 바로 위와 같은 이상이 달성된 광경을 집약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 군신의 도리로 이어짐으로써 국가가 화평함을 유지하게 된다는 뜻을 보이고,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창성을 기원하면서 작품을 종결하였다. 이처럼 <연형제곡>은 표면상으로는 세종과 양녕대군의 우애를 감격적으로 과시하면서 세종을 칭송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임금과 그 형제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행실을 작품에 표방함으로써 장차 그러한 도리를 힘써 지켜 나가야 한다는 권계 내지 규준을 전달하고 있다. ‘현금(現今)의 일’을 악장으로 가영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세종이 자신에 대한 칭송이 포함된 <연형제곡>을 승인한 것을 보면, 세종 역시도 작품의 내용을 당위적 수사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연형제곡>이 세종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불리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악장가사에 수록되었다는 점을 통해 확인된다. 임금과 대군들 사이에는 언제나 잠재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만큼, <연형제곡>에 담긴 규계의 뜻이 후대에도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목차
Ⅰ. 서론
Ⅱ. <연형제곡>의 제작 배경과 시기
1. 양녕대군을 위한 설연(設宴)
2. 연향악의 정비와 악장 제작
Ⅲ. <연형제곡>의 지향과 활용
1. 작품의 지향
2. 특징과 활용 양상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