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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탈 변화요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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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Factors in the Transition of the Cheoyong Mask

김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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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the Cheoyongmu is the mask of Cheoyong. Even if all of the costumes are present, the performance is not considered Cheoyongmu without the mask. In the ninth volume of ancient record Akhak gwebeom, in the section titled “CheoyongGwanbokDoSeol,” the making of the mask is recorded in detail., as well as the costumes and accessories used in the Cheoyongmu. From 1394 to 1442 (Sejong ’24), Cheoyongmu actors were women; however, men performed the Cheoyongmu for 61 years, from 1443 (Sejong ’25) to 1504 (Yeonsan ’10). After that time, the Cheyongmu was performed by women again. As of 1504, the Cheoyong mask underwent a drastic development. The time-frame of this change was 11 years after the Akhakgwebeom was written. Under the Yeonsan kingdom, Cheoyongmu was recorded in greater detail, mainly because of the king’s great interest in the performance. The significant changes made to the Cheoyong mask also occurred because the performance attracted the king’s attention. One example of the change of the design can be found in the mask’s beard; in the description in “Pubyok pavilion banquet,” the Cheoyong mask has no beard, which is extraordinary because this became one of its most distinctive features. Another example is the protruding jaw of the mask. In the books of “Dobyoeng” and “Gyecheop,” the jaw part of the mask was significantly emphasized. All of these features contradict those mentioned in the Akhakgwebeom. The design of the Cheoyong mask was not concluded in the time of writing the Akhakgwebeom; instead, it underwent significant and constant change over tim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era, the mask design deviated from the original design used in the Chosun dynasty. The office of the “Aakubu” is known to have performed the Cheoyongmu; however, the mask and costumes were not consistent with the original version of the performance. This is considered to be a separate artwork rather than the Cheoyongmu. There is also a record showing that some Japanese people made Cheoyong masks in that era. Throughout the late Chosun dynasty, the design of the Cheoyong mask was distinct to what is believed to be the original. However, the exceptionally long jaw of the mask, as described in “Heon-jong-dae mu-sin-jin-chan-do-byung,” is no longer reproduced. Regarding the changes of the mask in this era, it the true original design of the Cheoyong mask remains controversial. This represents another cultural disturbance stemming from the enforced occupancy by Japan. In this regard, the study of the Cheoyong mask represents the recovery of the distorted tradition of our country. From studying the Akhakgwebeom, as well as other historical records, we are finding out about a variety of original designs of the Cheoyong mask, including a humorous version from the Chosun dynasty era.

한국어

처용무를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처용탈이다. 아무리 처용무의 춤사위를 구사하고 처용의상을 입고 춤을 추어도 처용탈을 쓰지 않으면 처용무라 할 수 없다. 『악학궤범』 권9 처용관복도설에는 처용의 형상과 처용복식이 치수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처용탈과 복식을 제작 할 때 전범으로 삼고 제작에 임해왔다. 그러나 연구한 바에 따르면 처용무는 조선 개국(1394년)부터 1442년 나례 때(세종 24년)까지 48년간 女妓들이 추었고, 세종 25년(1443년)부터 연산 10년(1504년)까지 61년간은 남자 재인들이 춘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1504년부터 다시 여자들이 처용무를 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04년을 기점으로 처용탈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악학궤범』이 만들어진지 불과 11년 뒤이다. 처용무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있는 실록은 燕山君日記인데, 연산의 처용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처용탈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의 처용탈은 모두 얼굴이 길고, 특히 평양감사환영도의 부벽루연회도 속 처용탈은 수염이 없다. 평양의 기녀들이 추었기 때문이다. 그 외 전해지는 도병과 계첩의 처용탈은 한결같이 턱이 길게 강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처용탈들은 『악학궤범』을 典範으로 삼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되어 왔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처용탈은 조선시대 처용탈의 전승계보를 이탈 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왕직아악부의 함화진, 김영제, 이수경은 실제 처용무를 춘 적이 없으며, 복식과 처용탈 또한 남아있지 않아 새로 제작 했고, 제작할 사람이 없어 일본 사람이 와서 처용탈을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처용탈들은 조선 후기에 일관되게 이어져 오던 처용탈의 특징인 얼굴이 길고 턱이 유난히 긴 헌종대 무신진찬도병 처용탈의 맥을 잇지 못했다. 조선후기에 변화 발전해 오던 처용탈이 다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1493년의 『악학궤범』처용형상으로 되돌아 간 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원형과 전형의 논란에 하나의 사례로 회자 될 만하다. 우리나라는 역사나 민속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일제강점기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제강점기 동안 단절되고 왜곡된 우리문화의 제자리를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처용무의 처용탈도 『악학궤범』의 처용탈과 함께 조선 후기 처용탈의 해학적인 모습도 수용해 처용무 표현의 지평을 넓혀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1. 연구목적
  2. 선행연구 검토
 Ⅱ. 『악학궤범』의 처용탈
 Ⅲ. 처용탈의 변화
  1. 實錄상의 변화
  2. 연산군(燕山君) 대의 변화
  3. 연산군 이후의 변화
  4. 임진왜란 이후의 변화
  5. 순ㆍ종고종대 처용무 단절론
  6. 일제강점기의 변화
  7.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김용목 Kim-Yongmok. 중앙대학교 문화재학과 박사과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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