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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전선중 다부동전투의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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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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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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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은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 고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7월 5일에는 오산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하고, 7월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 목포와 진 주, 8월 초 김천과 포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낙동강전선(방어전선;평 화벨트)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인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치열한 전투가 여러 차례 일어나게 된다. 1950년 8월, 북한은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를 집중적으 로 공격했다. 8월 3일 유엔군이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 을 치며 낙동강 주변 일대로 전선이 점차 고정되면서 전투의 강도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바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투중 하나가 국군 제1사단 중심의 낙동강 전선 중 칠곡 다부동이다. 칠곡군 다부동전투의 발생·시작 일시는 공식 적으로 1950년 8월 1일 - 1950년 9월 24일이다. 보통 북한군의 8월 공 세만으로는 31일간의 전투로, 그리고 북한군의 9월 공세까지를 든다면 다부동전투는 55일간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후 북한군은 8월 31일 9월 공세를 전개하였고 여기서 9월 14일 동해 영덕 장사해변에 학도병이 다수 상륙하여 희생당했는데, 이는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9월 15일 새벽 1시 유격대원이 팔미도 등대를 점화하 고 인천상륙함대의 진로방향 항로를 표시하였다. 마침내 미 제10군단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결국 김 일성은 9월 18일 단계적 철수 명령을 하달하더니 9월 20일 유엔군이 한강 남쪽 강변 노량진까지 진격하자 9월 23일 김일성은 인민군 총 후 퇴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 하였다. 이처럼 낙동강전선에서의 절체절명의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성공 에도 기여하였고 다시 서울이북 북쪽으로 전진하는데 중요한 역사적인 전투였다. 본 연구를 통하여 6·25전쟁 중 다부동전투에서의 희생과 승 리에 대하여 몇가지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인식할 수 있었다. 첫째,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방어전선에서의 헌신적인 전투가 없었다면 부산임시정부까지 함락될 수 있었고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수 도 있었다. 둘째, 북한군은 다부동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해야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셋째, 당시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 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을 적 에게 붕괴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 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넷째,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 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6·25 전쟁사에서 다부동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의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다섯째, 1950년 칠곡군 일대에서 전투가 벌이지는 동안 칠곡 주민들은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였다. 여섯째, 학생들도 긴급 모병 에 자원하고 여학생들도 의료·구호에 나섰다. 이러한 6·25전쟁에서의 다부동전투의 역사적 교훈은 전국민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식하도 록 일깨워준 것이 라고 사료된다.

목차

요약
 Ⅰ. 서론
 Ⅱ. 다부동전투중심의 남ㆍ북한 전투병력
 Ⅲ. 낙동강전선 칠곡지역 다부동전투 내용
 Ⅳ. 다부동전투의 역사적 평가
 V. 결론
 참고문헌

저자정보

  • 안성호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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