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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학자들의 尊王論과 老少分岐 (Ⅱ) -1683년 종묘 논쟁을 중심으로-

원문정보

Zunwang(尊王) Ideology and the Noron-Soron Divergence(老少分岐) in the 17th Century (Ⅱ)

17세기 조선 학자들의 존왕론과 노소분기 (Ⅱ) -1683년 종묘 논쟁을 중심으로-

우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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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어

1683년 종묘 전례를 둘러싼 논쟁은 존왕론과 행왕론의 대립이라는 사상적 구도 속에서 전개되었다. 효종의 북벌과 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존왕론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종묘 전례에 반영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의도는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중화문명의 정통을 밝히고 그 계승자로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는 주나라가 비록 미약하지만 그 정통성의 천명을 핵심으로 삼았던 공자의 『춘추』적 세계관의 토대에 서 있었다. 반면 위화도 회군의 존왕론적 의미를 부정하며 송시열의 종묘 논의에 반대했던 박세채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강조했다. 이는 주실의 정통성에 대한 별다른 언급없이 제후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행하여 왕 노릇 할 것을 유세했던 전국시대 맹자의 불존주론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왕론의 단초는 ‘실심․심공’을 내세우며 송시열의 북벌론과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했던 윤선거․윤증 부자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이때의 종묘 논쟁과 뒤이은 노소분기는 17세기 후반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주도자로 부상하던 정세 속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관한 상이한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였다. 중화가 사라지고 명나라의 부활이 난망해진 상황 속에서, 조선은 유교적 담론의 범주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염원했던 공자와 왕도정치의 내실을 주장했던 맹자의 상이한 문제의식은 17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했다.

중국어

1683年的围绕宗庙典礼的争论是, 以尊王论和行王论的对立为思想架构而展开的。宋时烈把孝宗的北伐和太祖的威化岛回军从尊王论的观点进行重新评价, 并主张把其意义反映到宗庙典礼, 其意图是把朝鲜王朝的认同建构于从周朝传承的中华文明的正统性之上。这点基于虽孱弱但以阐明其正统性为核心的孔子的春秋世界观的基础之上。 相反 朴世采否定了威化岛回军的尊王论意义, 并反对宋时烈的宗庙相关主张, 作为替代方案强调了实现王道政治。这又是传承了孟子的不尊重周朝的思想,孟子在没有特别提及周朝正统性就向诸侯游说国王应实行仁政。这种行王论的开端, 与打着‘实心、实功’的旗号批判宋时烈的北伐论和中华主义世界观的尹宣举、尹拯父子的思想有一脉相承的关系。 总之, 此时的宗庙争论和接踵而至的老论小论之间的分歧是, 在17世纪后半期清朝崛起为东亚主导者的局势之下, 就如何设定朝鲜王朝之认同而相异的世界观酿成的结果。中华之消失, 复辟明朝又无望的情况之下, 朝鲜在儒家话语的范畴之内如何持自身认同成为课题。孔子希冀恢复中华秩序, 孟子主张王道政治的实际, 两人的不同的问题意识对17世纪后半期朝鲜的知识分子依然有效。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天子와 王道: 孟子不尊周論의 현실적 의미
 3. 1683년(숙종 9) 종묘 논쟁의 추이
  1) 宋時烈의 尊王과 효종ㆍ태조 추숭론
  2) 朴世采의 行王과 不尊周論
 4. 맺음말
 참고문헌
 중문초록

저자정보

  • 우경섭 禹景燮.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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