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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과 남경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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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between Gaegyung and Namkyeong

최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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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studies is on the (re)forming and change of paths(roads) and stations between Gaegyung(開京-the capital city of Corea dynasty) and Namkyeong(南京) from Corea dynasty to Joseon dynasty. Many stations had accomodations of staying and eating on the road of Cheonggyodo(靑郊道) which was the main path between Gaegyung and the other southern areas. Seoul was called Namkyeong where royal palace was built in Corea dynasty. Many famous buddhist temples had been constructed in the Mountain of Samgaksan near Namkyeong. The two roads(East and West road) were made to go to Namkyeong from Gaegyung for many kings to visit the royal palace or buddhist temples in Corea dynasty. West road was made to move the royal shrine of the first king of Corea dynasty to the Mountain of Samgaksan(三角山) urgently during the war and was called straight course. East road was constructed for the king’s ceremonial visit to Namkyeong since the royal palace was built there. At the beginning of Joseon dynasty, the station system of Corea was changed and Cheonggyodo was deconstructed. West road was used for royal envoy to go to Ming dynasty from the new capital city, Seoul and the status of East road was changed. The name of Namkyeong station in East road disappeared and the names of some stations in West road were chang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new paths were made in the some part of West road when many royal tombs were constructed in the north of Seoul.

한국어

고려의 간선도로망과 역참제도는 12목 제도와 더불어 성종 시기(재위 981- 997)에 정립되었으며 개경과 남경 사이를 오가던 간선도로는 ‘청교도(靑郊道)’에 속하는 대로였다. 고려시대 남경에 궁궐이 조성되면서 수도 개경에서 남경으로 향하는 청교도 상의 노정에 변화가 생기고 이전에 양주로 접근하는 두 갈래 길이 대로로 정비되면서 동대로와 서대로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순행 목적에 따라서 노정은 선택적으로 이용되었는데 피난 등 급하게 움직일 일 때에는 직로(直路)가 불렸던 서대로가 이용되었다. 개경을 출발하여 청교역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고 도솔원, 광탄원, 분수원, 혜음원, 벽지역, 덕수원, 영서역을 지나 장의문을 통과하여 홍제원에 이르는 노선이다. 반면 개경에서 남경으로 왕실의 의전 행차가 있을 때에는 비교적 평탄한 길로 이어진 동대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마산역에서 동쪽으로 향해서 차유령을 넘어서 견주 치소, 녹양역, 해촌을 지나 노원역, 남경역, 남경으로 이어지는 노정이었다. 고려의 간선도로망과 역참제도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변했다. 고려 남경 시기의 역원들이 재편되어 일부 역은 양주목 관할하에 배치되면서 그 위상이 격상되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했으며 한양부 관할 하에 역 이름 개가 새로 나타나기도 했다. 중국 사신을 위하여 직로(서대로) 상의 사신들 노정에 있던 절을 원으로 고쳐 홍제원이 조성되었으며 흥인문 동쪽 5리 되는 곳에 기로와 재추들을 위하여 보제원이 설치되었다. 결과적으로 고려시대의 청교도는 와해되었으며 이때 남경역은 그 명칭이 사라졌다. 더불어 고려시대 의전으로 이용되던 동대로는 그 기능과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조선시대 후기-인조대부터 왕실의 능들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능행로가 조성되었다. 파주에 장릉이 조성되면서 이전 서대로 구간 일부에 능행을 위한 갈래길이 새로 조성되었으며 영조대에는 장릉을 파주에서 교하로 천장하면서 고려시대 서대로와는 별개로 완전히 새로운 능행로가 조성되었다. 새로 조성된 노선들이 서로 만나는 결절 지점에 있는 원(院), 신원(新院)이 수시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 남경유수관 양주 관할 하에 설치되었던 견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하나의 현으로 양주에 속했다가 이후 해체·흡수되면서 사라졌다. 견주는 충숙왕 때에 덕비(德妃) 홍씨로 인해 고려사에 나타나고 조선 태종실록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거란족을 비롯하여 여진족, 몽고족, 한족이 고려에 귀화해왔는데 그들의 일부가 견주에 정착해 살았다.

목차

Ⅰ. 머리글
 Ⅱ. 고려시대 삼각산과 남경
  1. 고려의 삼경제도의 확립과 남경의 등장
  2. 고려왕실의 남경 행차
  3. 고려말 남경으로의 천도 주장
 Ⅲ. 한성, 한양의 명칭변화
  1. 개요
  2. 한성, 한양, 양주의 의미
 Ⅳ. 개경과 남경간 대로와 역참
  1. 개경과 남경간 대로
  2. 청교도의 동서대로(東西大路)
  3. 고려시대 청교도 노정의 변화
  4. 조선시대 청교도 역원의 변화
 Ⅴ. 서(序)·기문(記文)·시문(詩文)에 나타난 역원의 모습
 Ⅵ. 견주(見州) 소고(小考)
  1. 견주고(見州考)
  2. 고려와 견주
  3. 견주에 정착한 향화인들
  4. 견주와 덕비(德妃)·명덕태후(明德太后)
 Ⅶ.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국문초록

저자정보

  • 최종현 Choi, Jong-Hyun. 통의도시연구소 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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