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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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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기요시(1871-1957)는 일본의 저명한 세균학자로 주로 1945년 이전에 활동하였다. 그 러나 시가가 연구자로서의 인생 후반의 10여 년 간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가는 1920년에 조선총독부의원장(醫院長)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서 조선에 건너 왔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개교와 관련해서는 비록 실현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국식 기독의학 과 임상의학을 연계하려고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을 거쳐 1929년에 는 경성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1931년 총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10 여년에 이른다. 본 논문에서는 학술연구와 식민지주의라는 문제를 체현하는 인물로서 시가 기 요시의 업적에 대해 고찰하였다. 시가 기요시는 주관적으로는 가치중립주의적인 학문 태도를 신조로 삼는 학자였으나, 그가 속한 전염병 연구소(후에 기타사토연구소)는 실학적 지향이 강하며, 시가도 결핵과 각기병과 같은 국민병의 조사와 예방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와 접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시가 본인 스 스로는 순수한 학문연구와 국가공헌 이라는 양자 사이에 모순되는 바 없이 한결같다고 생각하 고 있었으나, 식민지조선으로 공간을 옮기면 그러한 그의 생각이 지니는 정치성이 뜻밖의 곳 에서 표면화된다. 시가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보급을 중시하며 조선인 의학자 육성에 힘을 쏟은 한편, 전통 적인 한방의학 (의생)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뿐 만 아니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일어난 구보사건(1921년)과 관련 하여서도 일본인 교수의 차별발언에 조선인학생들의 항의에 대해서도 그는 끝내 조선학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시대는 한센병 연구에 주력하였으나, 한센병 치료를 둘러싸고 구미인 선 교사와 조선총독부 간에 헤게모니 경쟁이 일어나자, 시가의 한센병 대책을 둘러싼 언설 또한 1920년대 후반 치료퇴원주의로에서 30년대 초 강제격리주의로 급전환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의 한센병 대책과의 관련이 농후하다.
목차
Ⅱ. 조선 부임 이전
1. 시가의 경력
2. 학문관⋅국가관
Ⅲ. 조선 부임기 (1) - 경성의학전문학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1. 조선 부임의 경위
2. 조선관
3.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경영
Ⅳ. 조선 거주기 (2) — 경성제국대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1. 경성제국대학의 창설
2. 한센병 연구
Ⅴ. 결론을 대신하여
reference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