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만주개척단 파견은 1936년경부터 정부와 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개별적인 이주 보다는 단체이주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졌으며 이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 구성함으로써 현지에서 보다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하여 마을 전체를 이주시키는 ‘분촌’이 고안되었다. 1937년 분촌하여 만주국으로 이주한 나가노현 오히타니마을은 가장 유명한 규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오히타니마을 이야기는 소설로 쓰여지고 연극으로 상연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41년 제작된 국책영화 <오히타니마을>은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주국에서는 ‘만주인’에게 상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본고에서는 만주개척단을 다룬 영화가 만주국의 ‘만인’에게 상영금지당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만주국이 갖고 있던 만주문화의 표상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일본과 공유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음을, 일본영화와 만영의 영화, 그리고 검열자료 등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만영이 추구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영상이 무엇인지를 “만주 스타일”이라는 용어로 수렴하여, 이것과 <오히나타 마을>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만주에 대한 동경보다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떠난 이들의 영화 <오히나타 마을>이, 만주국에 의해서 상상되어진 “만주스타일”과 괴리가 있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상의 괴리의 발견은 만주국이 일본이 만들어낸 ‘가구(假構)’에 불과했음을 반증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일본어
1936年から満州開拓団の派遣は、政府と軍によって本格的に推進された。また、個別的な移住よりは、団体移住が望ましく思われた。それは、移住の前から知り合っていた人々が、より現地適応に勝れるという考えからであった。それで、一つの村から集団で移住する「分村」が考案された。1937年に分村して満州国に移住した長野県の大日向村は、一番有名な模範的な事例になった。大日向村の物語は、小説に書かれ、芝居にも上演され、映画にもなった。1941年に製作された国策映画<大日向村>は、日本で大きな反響を呼び起こし、朝鮮においてもその影響が見つけられる。だが、満州国においては、「満人」に上映されることは禁止された。その原因を本稿は、映画と原作との比較、満映の映画との対照、そして、検閲資料の分析を通じて追究し、当時の満州国が求め、見せようとした映像が何かを「満州スタイル」という言葉に收斂して、それと<大日向村>との差異を指摘した。満州に対する憧れよりも、現実的な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移住した者たちの映画<大日向村>が、満州国において想像されていた「満州スタイル」との乖離があったことは当然であろう。
목차
2. “신(神)도 재건할 수 없는 마을”
3. 두 개의 오히나타 마을 1 : 분촌을 둘러싼 대립
4. 두 개의 <오히나타 마을> 2 : 소설과 영화
5. 상영금지 된 <오히나타 마을>
6. “만주스타일”과 <오히나타 마을>의 괴리
7. 나가며
reference
abstract
영문 abstr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