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Hygiene Policies of the Japanese Empire in the 1910s and the Local Communities
초록
영어
The hygiene policie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the 1910s were determined in the process of conflicting, negotiating and competing with the private sectors including nobles of Joseon, the oriental medicine assembly, the Japanese medical association, western missionaries and so on. The hygiene administration in Joseon was decided not in the binary confrontation between the ruling authority and the oppressed, but in the multilayered structure where the governing power, the subjugated class, Japanese residing in Korea, missionaries participated, but the repressive reign by the military force in the 1910s led to noticeable autocracy. The Department of Police Affairs General Inspection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lung to their strict position against the nobles of Joseon with regard to a tomb problem and came into conflict with them, the target to win over and conciliate to their side. Korean nobles were also concerned with the oriental hospital establishment movement carried forward by herb doctors, but only to fail because of the oppression by the military police alerted to the herb doctors’ gaining political power. Whil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was passive about medical education, western missionaries actively tried to set up and expand medical education organizations, which pressure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found a medical college. This le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fall into a defensive position in the competition for hegemony centered around hygiene and to change their previous attitude to a forward-looking one toward medical education. It didn’t want western missionaries to extend their influence through medical care and education. The Japanese medical association joined a provisional hygiene committee of Gyeongseong in order to prepare for a competitive exhibition, but it was nothing more than an emergency measure for a show. A central medical association in which the medical association could also participated was discussed in the process of legislating an infectious disease prevention law, but failed, and the participation of the private sector in the hygiene administration was extremely restricted compared to Taiwan.
한국어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은 조선귀족, 한방의회, 일본인의사회, 서양인 선교사 등의 민간 부분과의 대립・교섭・경쟁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조선에서의 위생행정은 지배 권력과 피통치자 사이의 이항대립적인 구도가 아니라 지배권력, 피통치자, 재조일본인, 선교사 등이 참가하는 중층적인 구조에서 결정되었으나 1910년대 헌병중심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전제성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묘지문제에 대해서 조선귀족들한테도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묘지문제를 둘러싸고 포섭과 회유의 대상이었던 조선귀족들과도 갈등을 빚어갔다. 조선귀족들은 한방의들이 추진한 한방식피병원설립운동에도 관여하지만, 동 운동은 한방의의 정치세력화를 경계하는 헌병경찰의 탄압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데라우치 총독은 부임당시 의료기관의 확충을 시정의 중요한 사업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식산이나 교통정비를 우선시하여 대한의원부속의학교를 축소하는 등 의학교육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요망을 수용해서 서양선교사는 적극적으로 의학교육기관의 설치와 확장을 시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위생을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에서 수세적인 입장에 처해지게 되자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의학교육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인가하기 전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총독부는 의료, 교육을 통해 서양인 선교사들이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일본인의사회는 임시경성위생위원회에 참가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진회 준비를 위한 비상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의사회도 참가할 수 있는 중앙위생회 설치는 전염병예방령의 제정과정에서 논의는 되었지만, 결국 설치되지 못하고 민간의 위생행정에의 참가는 대만과 비교해 보더라도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처럼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행정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조선인, 재조일본인, 서양인선교사를 포함한 조선 사회와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일본어
朝鮮総督府の衛生政策は朝鮮貴族、漢方醫会、日本人醫師会、西洋人宣教師などの民間セクターとの対立⋅交渉⋅競争の過程において決定された。朝鮮貴族と連携しつつ推進された漢方醫師らによる漢方式避病院設立運動は、漢方醫の政治勢力化を警戒する憲兵警察の弾圧によって失敗に終わった。他方、日本人醫師会は共進会の準備のため、臨時京城衛生委員会に参加したが、それはあくまでも共進会準備のための非常処置にすぎなかった。醫師会も参加できる中央衛生会については伝染病予防令の制定過程で議論はされたものの、結局設置されず、民間の衛生行政への参加は台湾に比べて極めて制限された。さて醫学教育に消極的な朝鮮総督府に比べ、西洋宣教師は積極的に醫学教育機関の設置及び拡張を試み、朝鮮総督府の醫学専門学校設立に圧力をかけた。このように一九一〇年代の衛生行政は朝鮮総督府、特に警務総監部の専制性が顕著になるなかで、民間セクターと結びつきながら重層的に決定された。
목차
2.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
3. 조선귀족과 묘지규칙
4. 醫生会와 피병원설립운동
5. 의학교육과 서양인선교사
6. 京城醫會와 전염병예방령
7. 맺으며
reference
abstract
영문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