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study attempts to analyze Jinju Regional Association of Taehan-hyuphoi (the Korean Association, 1907-1910) and review the process of its formation, the membership characteristics, the activities of its members, etc. Jinju Regional Association was the first organization of the Korean patriotic culture enlightenment movement in Jinju. Jinju, provincial capital of Gyeongsangnam-do at the beginning of 20 century, failed to adapt to changing times and circumstances and embrace new ideas and innovations. For example, private secondary schools had not mushroomed before 1909 and there were not any local self-governing organization at that time. The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in 1907 raised the local people's awareness of the social consciousness, leading to the formation of Jinju Regional Association. This local association consisted of local Neo Confucianists (Renavative Scholars), leading citizens (Heavy hitter), landlords, a local government official, but few merchants. Firstly developing the organizing enlightenment movement in Jinju, they were devoted to the foundation and operation of private schools and the spreading of the knowledge about public law. In addition, they planned to publish monthly magazines and delivered the lectures to the audience in a regular basis. They also tried to protect the profits of the citizens against the tyranny of the non-native provincial governors residing in Jinju: they did anti-Iljinhoe (a pro-Japan organization in Korea) activities and led to the abortion of illegal taxing practices. Due to the fact that most members were landlords, their achievements did not include economic activities. Though it is not deniable that the members intended to expand the influence in the region through this local association, but it is also true that it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Korean patriotic culture enlightenment movement in Jinju at the beginning of 20th century.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 colonial administration, most members worked as local governors (i.e. the head of the town called Myeon), whose position was so powerful that they became the leading citizens (i.e. heavy hitters) in 1920s and later they conformed to Japanese Imperialism.
한국어
대한협회 진주지회는 대한제국기 진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조직적인 계몽운동단체였다. 진주지역은 20세기 초 불어닥친 문화계몽운동의 열풍을 선도적으로 수용하지는 못하였다. 행정 중심지로의 위상이 오히려 관치일변의 지역정서를 가져왔고 민의소와 같은 자치조직의 존재도 발견되지 않는다. 연관하여 실력양성운동의 지표인 사립학교의 설립도 1909년 이전까지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낙동강 연안을 따라 성장하던 경남 동부지역의 개항지에 비해 시세변화에 민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풍조의 유입이 차지하다”는 당대의 진단에서 당시 진주의 정세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1907년 진주지역에도 폭발한 국채보상운동은 계층을 망라한 지역민의 ‘참여’였고 그들의 사회의식을 각성시킨 의미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직후 본회의 결성 노력과 지역 유지들의 의지가 결합하여 대한협회 지회가 진주에서 최초로 조직되게 된다. 진주지회의 핵심 구성원들은 개명유림, 중소지주, 전·현직 관공리라는 당시 유지의 일반적 성향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상인층의 존재가 미약하고 관공리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행정 경험을 갖춘 이들 토호들은 지회를 통해 조직적인 계몽운동을 진주에서 전개하였다. 지회 차원에서 야학을 설립하였고 법률지식을 보급하였으며 월보 발간을 계획하였다. 토론회와 강연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개인적으로 학교를 건립, 운영하였으며 후원 활동도 열성적이었다. 진주지역 사립학교의 설립이 1909년 중엽을 기점으로 활발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 유지와 영향력의 행사라는 측면과 별도로 진주지회는 타지 출신 관찰사의 탐학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주민의 재산권 보호에도 적극 개입하여 시장세 폐지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면모는 당시 지역의 또 다른 유지집단 이었던 경남일보 관여자들의 행보와 비견되는 것으로 대한제국 말기 진주지역 유지층의 판도를 나타내는 사실이기도 하다. 관공리 경력과 지회 활동으로 획득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들의 상당수는 1910년대 진주 관내의 면장으로 진출하여 행정 일선에 서게 된다. 그러한 기반에서 이들은 1920년대에 오면 식민지 현실에 안주하는 유지집단, 즉 지방의 유력자로 운신하게 되는 것이다.
목차
Ⅱ. 대한협회 진주지회의 결성배경
Ⅲ. 대한협회 진주지회의 결성과 구성원
Ⅳ. 대한협회 진주지회의 활동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