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Similarities between Korea’s Muaehi and Japan’s Odorinenbutz have been indicated since early enough in both being devised by the Buddhist monk Wonhyo (617~686) and Kuya (903~972), respectively, that dance was used for the public propagation, and the same instrument of a bottle gourd used. However, these two popular plays have taken their very different courses in history since rhe ancient times. This study aimed to consider particularities shown in the formation and change of both popular plays by comparison and investigate the Particularity In the 7th and 10th century when Wonhyo and Kuya lived, Korea and Japan met a turning point from aristocratic Buddhism to the public Buddhism, respectively. In the center of the transition lay the Belief in the Pure Land which emphasized the practice of Buddhist prayer. Besides, in the region of East Asia, there had been a shamanic ceremonial singing and dancing using a bottle gourd, and Muaemu and Odorinenbutz were brought into being by combining such tradition of incantation singing and dancing with deed of Buddhist prayer. Passing through the Middle Ages, Muaemu and Odorinenbutz followed the path of performing arts. Muaemu was incorporated into a royal procession and settled as performance for a Royal family and the upper classes with the subject of play changing to professional entertainers. On the other hand, Odorinenbutz of Itpen Shoning in the 13th century, which succeeded to Kuya’s Odorinenbutz, was the public Buddhist play of group dancing in ecstasy with the populace. Itpen, who had planned and improved the existing Odorinenbutz into a strong performance, took the lead in the public propagation touring the whole country. Muaemu, which had been abolished by Buddhism-restraint policy in the Joseon period, revived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s the court ceremony but it was Confucian ceremonial music in supplication for the king’s longevity with Buddhist character removed altogether. On the other hand, in modern ages, Odorinenbutz was succeeded to by Hachi Tataki, a private art group half secular and half clerical. as popular accomplishments for repose of souls and wishing a long life. Today, Odorinenbutz is transmitted in the Buddhist ceremony and village festivals around the country advocating the cause of Kuya’s and Itpen’s Odorinenbutz.
한국어
한국의 무애무와 일본의 오도리넨부쓰는 각각 원효(617∼686)와 구야(903∼ 972)라는 승려에 의해 고안되었다는 점, 민중 포교를 위해 춤이 동원되었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 사용된 도구가 호리병박으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그 유사 성이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염불춤’은 고대시대 이후 매우 다른 변 천사를 걸어 왔다. 이에 본 연구는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의 傳承史를 비교 고찰하 여 그 특징을 파악하고 이를 한일 불교 예능사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원효와 구야가 활동했던 7세기와 10세기의 한일 양국은 각각 귀족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가던 전환기였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염불의 실천을 강조하는 정토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호리병박을 이용 한 주술적 歌舞가 존재해 왔는데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는 이러한 주술적 가무 전 통에 염불행을 결합시켜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시대 민중 속으로 퍼져나간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는 중세시대에 접어들며 공연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고려의 무애무가 심오한 불교철학 사상을 체화 하며 궁중연희로 귀족화한 반면, 일본 중세의 오도리넨부쓰는 무아지경의 파격적 퍼포먼스로 기획되어 민중포교에 앞장서며 민간예능의 성격을 강화해 갔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폐지되었던 무애무는 19세기 말 궁중의례로 부활되었 는데, 이때의 무애정재는 불교적 색채가 완전히 탈각된 채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 원하는 의례악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근세시대 오도리넨부쓰는 半俗半僧의 예능 집단인 하치타타키에 의해 진혼과 祝禱의 서민예능으로 계승되었고, 오늘날에도 구야와 잇펜의 오도리넨부쓰를 표방한 민간예능이 전국의 사찰과 마을축제에서 연행되고 있다. 이렇듯 일본의 오도리넨부쓰가 불교예능의 전통을 이으며 전국의 사찰과 민속 의례의 장에서 연행되고 있는 반면, 원효의 무애무를 표방한 불교예술이 귀족화 의례화의 길을 걷다 결국 전승 기반을 상실하고 맥이 끊긴 현실은 한국 불교 예능 사를 생각할 때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의 성립-염불과 춤과 주술
Ⅲ.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의 중세적 변용
Ⅳ. 근세 이후 무애무와 오도리넨부쓰의 道程
Ⅴ.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