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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牙山지역의 의병투쟁

원문정보

Righteous Army Movement in Ahsahn Region in the Period of Great Han Empire.

한말 아산지역의 의병투쟁

박민영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35집 2015.12 pp.18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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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t was about Feburary of 1896, that the movements of Righeous Army was first spotted in Ahsahn region. A branches of Jecheon Righteous Army came to Ahsahn. This branches of Righteous army were not directly related to the regional anti Japanese movent rather just passing through. Early period of Righteous Army in this region was led by Lee Se Young who is descendant of Korea’s National Hero, General Lee Sun Shin. Lee Se Young was also a main figure of Hongju Righteous Army movement. He attacked Hongju postal office and captured their leader. In the middle year of this Righteous Army, Prominent figures from Ahsahn region were participated at Hongju Movement as well. Escpecially student under Choi Ik Hyeon, Kwak Han Il took important role. Choi Ik Hyeon and Ahsahn were acquainted after October of 1862. After that Choi Ik Hyeon mobilized his army, in the spring of 1906. This time, Choi ordered Nam Kyu Jin and Ahsahn to mobilize Righteous Army force in Jeolla Province. In Hong Ju as well, after 1905 Eulsa Treaty, Massive amount of Righteous Army were mobilized.

한국어

오늘날의 아산시 경내에서 처음으로 의병의 동향이 파악되는 것은 1896년 2월 무렵이었다. 제천의병의 일파가 아산에 들어온 경우가 그것이다. 이 의병은 아산지역의 항일세력과는 크게 연관되어 있지 않고 아산을 통과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전기의병 시기 아산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이세영(1869~1938)을 들 수 있다. 이세영은 홍주의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전기 홍주의병의 중심인물들과 연계되어 거사에 깊이 관여했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홍주의병이 일어났을 때 홍주 경무청을 파괴하고 경무관을 포박하였던 인물이다. 중기의병 시기에도 아산 출신의 지사들은 홍주의병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최익현의 제자였던 곽한일의 역할이 주목된다. 최익현이 아산과 인연을 맺었던 것은 1862년 10월에 신창 현감에 부인한 것이었다. 그뒤 정산에 내려와 살던 최익현은 1906년 봄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아산의 곽한일은 예산 출신의 남규진과 함께 최익현의 명령을 받고 호서지방 거사의 책임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호서의병과 최익현이 주도하는 호남의병 사이의 연락과 통신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주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중기의병 시기에도 대규모 의진이 편성되어 활동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세영과 곽한일, 그리고 성재한 등 아산 출신의 인물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홍주의병의 중심축의 일부를 이루었다. 성재한은 운량관, 이세영은 중군장, 곽한일은 돌격장에 각각 선임되었다. 홍주의병은 패산 후 재기항전을 위해 의병 동지들이 합심하여 노력하였다. 곽한일은 1906년 10월 이남규의 집에서 이용규ㆍ박윤식ㆍ박창로 등 의병 동지들과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각지 의병을 모아 예산 관아를 공격하기로 하고 11월 20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며,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누설되면서 이들이 모두 피체되고 말아 재거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곽한일은 종신형을 선고받아 전남 지도로 유배되었다가 경술국치 후인 1912년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기의병 시기에 아산지역에서 벌어진 의병의 항일전은 1907년부터 1909년에 이르기까지 자료상 산발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 의병은 많게는 150명, 작게는 십여명 내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의병들이 아산지역 경내의 주재소ㆍ분파소 등을 과감히 습격하기도 하였고, 또 경내 각처에서 일제 헌병, 경찰대와 대소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집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홍주의병과 아산
  1. 李世永의 전기 홍주의병 참여
  2. 중기 홍주의병과 아산
 Ⅲ. 아산지역의 후기의병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박민영 Park, Min Youn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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