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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塔式伽藍配置의 기원을 통한 新羅와 隋의 관계

원문정보

The Relation Of Silla(新羅) and Sui(隋) Through Origin Of Twin-Pagoda Temple-Site Lay out

쌍탑식가남배치의 기원을 통한 신라와 수의 관계

박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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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win-Pagoda temple-site lay out(雙塔式伽藍配置)」 is the distinction of Unified Silla era(統一新羅時代). Opinion about twin-Pagoda temple site lay out is four. Those are opinion about the importance of building, opinion about the succession of the three kingdoms era(三國時代), opinion about the doctrinal cause, opinion about the external cause. Among them, the opinion about the external cause is mostly the opinion understanded cause from Tang(唐). But that is not definite reason. So, in this manuscript Twin-Pagoda(雙塔) is described external cause. First, It is examined 「Twin-Pagoda temple site lay out」 of GyungJu(慶州) and the outside of GyungJu(慶州). As a result, If it is included Gyungsangbuk-do Twin-Pagoda is spread of 2/3 of the country. First, it is fashionable in the center, Secondly it is popular in the province. Twin-Pagoda is a expression to the identity of the royal family and the nobility. Because, its record remains much. that spread into outside of GyungJu(慶州) in the ninth century. Secondly, It is examined temple site lay out of China. As a result, after the last period of Han(漢), there are many examples. the examples are Changlesi(昌樂寺:early in the 4th century) of DongJin(東晋), Xianggongsi(湘宮寺:471) of LiuSong(劉宋), Huifusi(暉福寺:488) of BeiWei(北魏), Changgansi(長干寺:538) of Liang(梁), Guangmingsi(光明寺:584) and Chandingsi(禪定寺:612) of Sui(隋). And these are all 「Twin-Pagoda temple site lay out」. But to temple-site identified as the excavations yet 「Twin-Pagoda temple-site lay out」 was not found. Twin stone pagoda Tang(唐) made was confirmed. But It was erected later than GamEunSa- Temple site(感恩寺址) Stone Pagoda. Therefore, Since the second half of the 5th century, In south and north of China, Twin-Pagoda had erected. Finally, I examined 「Origin Of Twin-Pagoda Temple-Site Lay out」 through Sui(隋). For this, I criticized the relation of Silla(新羅) and Tang(唐). I presented based on two major. The one is international affairs of the time. There was a conflict of the two countries at the time. The other, In Tang(唐) There is not twin-pagoda earlier erected than korea's first that. The Succession from three Kingdoms era is no evidence, too. Therefore, twin-pagoda of Silla(新羅) is related to that of Sui(隋). Because, 1st, there are records to twin-pagoda erected in Sui(隋). 2nd, Sui(隋) except Tang(唐) timely is closest to Silla. 3rd, At the time between Sui(隋) and Silla(新羅), international relations were very closely. 4th, After Seeing the Subject incomed HwangRyongSa-Temple(皇龍寺) pagoda-site(木塔址) Bronze-Mirror(靑銅四神鏡) made Sui(隋) at 7th century, the twin-pagoda of Sui(隋), they would apply to newly building.

한국어

쌍탑식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적인 가람배치이다. 쌍탑식가람배치의 기원에 대한 諸견해는 크게 건물의 중요도에 의한 것으로 보는 시각,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계승으로 보는 시각, 교리적인 원인으로 보는 시각, 외부적 동인으로 보는 시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외부적 동인으로 보는 시각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唐을 그 기원처로 삼는 견해가 답습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고에서는 쌍탑식가람배치의 기원을 외부적 동인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설명하였다. 먼저, 삼국통일기 신라의 가람배치를 경주와 경주 외로 나누어 검토하여 쌍탑식가람의 현황과 분포를 알아보았다. 그 결과 쌍탑식가람은 경주에 집중되어 있고, 경북지역을 포함해면 전국적으로 2/3가량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체적인 분포양상도 경주를 중심으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로 조금씩 퍼진 형상인데, 이것은 쌍탑식가람이 중앙에서 먼저 유행한 후 지방화한 증거로 생각된다. 쌍탑식가람은 신라왕공귀족들의 정체성의 표현이라고도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쌍탑식가람 중 창건에 대한 문헌기록이 남아있는 사찰은 왕실과 최고귀족들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경주 외곽으로 쌍탑식가람이 퍼져나가는 시기는 현재의 자료로 볼 때, 약 9세기로서 그 전에는 경주지역에서만 유행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가람배치를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최초의 불사 건축이 발생한 한말 이후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4세기 초반 東晋 武昌 昌樂寺, 劉宋 471년에 건립된 湘宮寺, 北魏 488년에 건립된 暉福寺, 梁 538년 건립된 長干寺, 隋 584년 光明寺, 612년 禪定寺 등에 쌍탑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발굴조사로 확인된 사지에서는 아직 쌍탑식가람이 발견된 바 없다. 가람배치가 아닌 쌍석탑만은 당대의 것이 확인되었지만 감은사지 석탑보다도 시기적으로 내려온다. 문헌기록과 발굴조사 결과 그리고 물질자료를 살펴보면, 적어도 5세기 후반이후로는 중국 남․북방에서 쌍탑이 계속해서 건립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쌍탑식가람의 기원을 隋와 연관지여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기존의 唐기원설을 비판하였다. 그 근거로는 크게 2가지를 들었는데, 먼저 당시의 국제정세이다. 통일과정에서 마찰을 빚었던 당과 신라의 외교관계 문무왕대를 시작으로 효소왕대까지 견당사 파견이 크게 줄어서 양국의 관계가 매우 소원하다가, 성덕왕대에 이르러서야 회복됨을 알 수 있었다. 한반도 최초의 쌍탑식가람을 가진 사찰인 사천왕사는 679년에 완공되었는데, 사천왕사가 가진 反唐적인 성격을 감안하고, 이후의 양국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당대에 유행하던 가람배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 근거로는 지금까지의 문헌자료와 물질자료를 통해서는, 唐대에는 한반도 최초의 쌍탑식가람보다 이른 시기의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문헌에 동․서탑의 개념으로서 천복사의 동탑원과 서탑원, 흥당사의 동탑원, 보응사의 서탑원처럼 唐대의 쌍탑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있지만 각각의 탑이 각각 별도의 院에 배치되는 형태로 보이기 때문에 확증하기는 어려우며, 한반도에서는 多院式의 가람배치가 유행하지도 않았다. 또한 물질자료로 제시된 唐대의 쌍탑은 모두 盛唐과 中唐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초기 쌍탑식가람인 감은사의 초창연대보다도 시기가 내려오기 때문에 唐대의 쌍탑을 본떠서 통일신라시대 쌍탑이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입증이 불가능하다. 앞선 두 가지의 이유와 함께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唐의 상황을 기록한 日僧 옌닌의 󰡔入唐求法巡禮行記󰡕에 쌍탑에 관한 내용이 없다는 점도 간접적 증거가 될 것이다. 삼국시대로부터의 계승도 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 광명사 쌍탑(584년), 선정사 7층 쌍목탑(612년) 등의 수대 탑이 신라의 쌍탑과 가장 연관관계가 클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로는 (1)문헌에 隋대에 건립된 쌍탑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 (2)隋는 唐을 제외하면 시기적으로 통일신라와 가장 근접한 국가라는 점, (3)隋와 신라와의 국제관계가 당시 매우 긴밀하였다는 점, (4)7세기 1/4분기에 제작된 황룡사 목탑지 출토 隋제 청동사신경을 들여온 주체가 隋대에 건립된 쌍탑을 실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사천왕사에서 새로운 건물배치로 적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쌍탑식가람배치는 통일기라는 시점, 건물배치의 특이성, 탑재료의 변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동반되기 때문에 한 시기의 증거로 제시될 뿐만 아니라 그 해석에 대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다만 최근의 여러 예와 같이 교리적 근거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의적 해석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 증거도 참고하여 균형 있게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불교사원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문제점도 향후 보완될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국문요약
 1. 서론
 2. 한반도 쌍탑식가람배치 검토
 3. 중국의 가람배치 검토
 4. 쌍탑식 가람배치의 기원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박윤배 Park, Yun-Bae. 국립김해박물관 연구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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