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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學】

로쿠메이칸鹿鳴館 무도회로 본 일본표상

원문정보

Japanese Representation focusing on a Ball in Rokumeikan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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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new Meiji government completed the construction of Rokumeikan, a foreign guest house in 1883 in order to revise the unequal treaties reached with Western powers and used it as a place for the self- identification of ‘civilized Japan.’ This ambitious work by the ‘Japanese theater company’ composed of select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as a European ball that completely catered to the ‘civilized’ Western style of Europeans. However, the ‘era of Rokumeikan’ ended with the failure to amend the treaty in 1887 and since then, a Ball in Rokumeikan has been remembered as a failure of the past with derision of ‘monkey show’ and self-mockery of ‘a wild spree’. Meanwhile, since the Taisho period, Rokumeikan has been well represented in the genealogy of ‘Rokumeikan literature’ with the emergence of Akutagawa Ryunosuke’s “A Ball”(1924), Mishima Yukio’s “Rokumeikan”(1956), Yamada Futaro’s “A Ball in Edo”(1983), and Kazeno Michio’s “Candid shot of Rokumeikan”(2010). These works used a ‘caricature’ image of Rokumeikan as a subject of work instead of simply denying it. ‘Rokumeikan literature’, which has intertextuality with such ‘caricature’, is shaping a ball in Rokumeikan as a drama of the transformation of ‘modern Japan’ rather than the ‘borrowed dance party’, which was the subject of ridicule and self-mockery.

한국어

메이지 신정부는 막말 이래 최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조약개정을 위해 1883년에 본격적인 외빈접대시설 로 쿠메이칸을 완공, ‘문명국 일본’의 자기증명의 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는 유럽인의 문명적 이미지에 맞춘 유 럽산 무도회가 열렸다. 그러나 1887년, 조약개정 교섭의 실패로 화려한 ‘로쿠메이칸 시대’는 조기에 막을내리고, 이후의 로쿠메이칸 무도회는 구미문명의 표면적인 ‘원숭이 흉내’(조르주비고), 또는 경박부조한 ‘야단법석 소동’(고바야시 기요치 카)으로 희화화되었다. 한편, 문학에서는 피에르 로티의 「에도의 무도회」(1889)의 등장인물을 시점화자로 설정한 아쿠타가와 류노스 케의 「무도회」(1924)를 효시로, 미시마 유키오의 「로쿠메이칸」(1956), 야마다 후타로의 『에도의 무도회』 (1983), 가제노 미치오의『로쿠메이칸 도촬』(2010) 등, 다이쇼기 이래, 로쿠메이칸 무도회를 다룬 작품들이 발표됐다. 로쿠메이칸 무도회의 희화적 이미지와 상호텍스트성을 지닌이들 ‘로쿠메이칸 문학’은 로쿠메이칸 무도회를 조소와 자조의 대상인 ‘빌려온 댄스파티’에서, 근대일본이라는 독자적인 변신의 드라마로 거듭나게 하였다. 이로써 로쿠메이칸 무도회는 유럽문명이라는 타자표상에서 근대일본이라는 자기표상으로 전생하게 된 것이 다.

일본어

明治新政府は、幕末以来の最大の外交的懸案であった条約改正のため、1883年、本 格的な外賓接待の施設として鹿鳴館を建て、〈文明国日本〉の自己証明の場とした。そ こでは欧米流の舞踏会が催され、欧米人の瀟洒な文明イメージに沿うかたちでの演出 がなされたのである。だが、1887年、条約改正交渉の失敗により、華麗なる〈鹿鳴館 の時代〉は早々に幕を下ろすこととなった。以後、鹿鳴館の舞踏会は、欧米文明の表面 的な「猿真似」(ジョルジュ・ビゴー)として、あるいは軽佻浮薄な「乱痴気騒ぎ」(小林清 親)として、しばしば戯画的にイメージ化されることとなった。 一方、文学においては、ピエール・ロティの「江戸の舞踏会」(1889)の登場人物を視 点話者とした芥川龍之介の「舞踏会」(1924)を嚆矢として、三島由紀夫の「鹿鳴館」 (1956)、山田風太郎の『エドの舞踏会』(1983)、風野真知雄の『鹿鳴館盗撮』(2010)等、大正期以来、鹿鳴館の舞踏会を扱ったさまざまな作品が書かれた。鹿鳴館の舞踏会の戯 画的イメージとの間で間テクスト的な関わりを持つ、これら〈鹿鳴館文学〉の系譜は、 鹿鳴館の舞踏会を、単なる嘲笑と自嘲の対象たる〈借りてきた舞踏会(ダンス・パー ティー)〉から、近代日本の独自の変身のドラマへと生まれ変わらせることに成功し た。鹿鳴館の舞踏会は、欧米文明という他者の表象から、近代日本という自己の表象 へと、転生を遂げていったのである。

목차

<要旨>
 Ⅰ. 머리말
 Ⅱ. ‘로쿠메이칸 시대’의 로쿠메이칸 무도회
  1. 보도 속의 공감과 이반
  2. 회화 속의 모사와 조롱・자조
 Ⅲ. 메이지기 이후의 로쿠메이칸 무도회
  1. 역사 담론의 출현─‘부負’의 과거사
  2. ‘로쿠메이칸 문학’의 출현과 아쿠타가와의 「무도회」
 Ⅳ. 전후 ‘로쿠메이칸 문학’의 계보
  1. 탈 ‘희화’적 상호텍스트성─미시마의 「로쿠메이칸」
  2. 탈 ‘희화’적 일본표상의 완성─미시아 이후
 Ⅴ. 맺음말
 參考文獻
 <要旨>

저자정보

  • 이경희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일본근현대문학・문화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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