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Fundamental Issue of Namdang Studies and Its Inheritance
남당학의 근본 문제와 학파의 계승 양상 - 춘추대의를 중심으로 -
초록
영어
This article is to take a broad view to fundamental issues of Namdang studies. The fundamental issues here are what is directly associated with 'finality of philosophy.' Namdang studies can be understood as systematization of Chunchudaeui, which served as a national policy in late Joseon, in terms of Neo-Confucianism. With its strong value-oriented feature, it is not desirable to put Namdang studies into a frame of pure philosophy. After Han Wonjin, Namdang school did not make any significant progress either in a scholarly or ideological sense. In the shadow of a great man Han Wonjin, it could hardly escape from a fine net of Namdang studies. In addition, the school's foundations came to collapse when school descendants fell from power after their aggressive intervention in politics. Han Wonjin's descendants could not properly recognize that his theories were reflection of the needs of the times. In the absence of development of logic and theoretical supplementation, it was hard to expect academic advancement. It was rather perceived as retardation to obstruct changes in the world of thought. Meanwhile, the initiative in academia and the world of thought as well as politics turned to Nakron (洛論). Isolation and demise of Horon (湖論) was predicted beforehand. There have been considerable scholars in modern times who claimed to support Han Wonjin as his spiritual descendants. They were based in Naepo (內浦) area primarily in 'Hongju (洪州)' and they presented grandeur of setting sun with action at the decline of dynasty.
한국어
이 글은 남당학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거시적으로 조망한 것이다. 근본 문제란 다름 아닌 ‘철학의 목적성’에 관련된 것이다. 남당학은 조선 후기에 국시(國是)나 다름없었던 춘추대의를 성리학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치 지향적 성격이 강한 만큼, 남당학은 순수철학의 틀에서만 논하기는 어렵다. 남당학파는 한원진 이후 학문적, 사상적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한원진이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지고, 남당학의 촘촘한 그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였다. 게다가 학파 후예들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다가 실각한 이후, 학파의 존립 기반이 무너져 갔다. 한원진의 후예들은 한원진이 제기한 학설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논리 개발과 이론 보완이 없다보니 학술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갈수록 사상계의 변화를 가로막는 저지력으로 인식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정치 운영은 물론 학계・사상계의 주도권이 낙론으로 옮겨갔다. 호론의 고립, 종말은 예견된 것이었다. 근세에 한원진의 정신적 후예를 표방하는 학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내포(內浦) 지역에 근거지를 두었으며, 왕조가 기울어가는 시점에 서산낙조(西山落照)의 장엄함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목차
1. 머리말
2. 남당학과 春秋大義
1) ‘大結局’의 시기와 춘추대의
2) 율곡학파의 道統과 춘추대의
3) 人物性論과 춘추대의
3. 학파의 계승 양상
1) 宋能相과 金漢祿의 경우
2) 호론의 몰락과 장엄한 落照
4. 맺음말: 남당학의 의의와 한계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