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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翰林別曲>이 조선시대에 유행한 사실을 초점으로 하여 조 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배경으로서 고려시대 <한림별곡>의 창작 상황을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조선시대 유행한 <한림별곡>의 구체적 인 양상을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배경으로서 <한림별곡>의 창작 상황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한림별곡>은 관계중심의 ‘좌주문생 연’이 아니라 소속 집단이 강조된 ‘한림연’에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 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기 좌주문생관계가 무너지고 ‘矜豪放蕩’하다 는 평가를 받은 <한림별곡>이 ‘한림연’을 계승한 예문관의 ‘면신연’을 통해서 조선후기까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3장에서는 2장을 토대로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양상을 살펴 보았다. 본고는 기존 연구 성과를 수용하되, 2장과의 유기적인 맥락 하 에서 살펴보았다. 즉,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은 두 가지 양상을 띠는데, 하나는 군주나 국가적 문제와 관련하여 藝文館, 四館의 공식적 자리에서 유행하였고, 다른 하나는 <한림별곡>이 예문관의 면신연과 결합하자 전자보다 사적인 성격을 띤 공간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이다. 예문관의 면신연과 결합한 <한림별곡>은 조선 전기 허참례 면신례의 성행과 비례하여 유행하였고, 면신연을 금지하는 구체적인 절목이 만들 어진 중종 36년부터는 점점 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림별곡> 은 藝文館이나 四館에서의 가창은 약화되고 일반 사대부나 지방 관리 의 酒筵공간, 妓房등을 중심으로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한림별곡>의 유행은 김만중의 시를 통해서 볼 때 17세기 후반까지 확인된다.
목차
Ⅰ. 문제 제기
Ⅱ. <翰林別曲>의 創作 背景으로서 高麗의 ‘翰林宴’
Ⅲ. 朝鮮時代 藝文館 ‘免新宴’과 <翰林別曲>의 流行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