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paper has for its object to study on the life sapects of Chosun's people in Shenyang. After the Manchu war of 1636(병자호란), Sohyun Crown Prince and about 500 Chosun's people had to live in in Shenyang where was the capital of the Qing Dynasty. They had no any power in many ways, therefore they was in the minority in Shenyang. They were forced to accept the culture and living habits and the rule of Qing Dynasty. They had to hunt, take part in the battles against Ming Dynasty. The language of Chosun was different from the Manchu language. The meaning of same word was different such as the word of Jutang(酒湯) meaned a female servant in Chosun, but it meaned a prostitute in Qing Dynasty. So Yonggoldae(龍骨大)who was general of Qing Dynasty got angry because he misunderstood that the the government of Chosun sent prostitute as a lady-in-waiting of emperor. Chosun's people in Shenyang were extorted by the government official of Qing Dynasty. They askde Chosun's people for money and property frequently. Chosun's people were in financial difficulties for all that they had to accept the claim of the government official of Qing Dynasty. Because Chosun's people had no power, the government official of Qing Dynasty intervened in troubles of Chosun's people, they solved the troubles as they pleases.
한국어
본 논문은 『심양장계』, 『심양일기』를 중심으로 청나라 심양에서 살았던 소현세자 를 비롯한 조선인들의 삶을 소수자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패전함으로써 청나라에 볼모를 들여보냈다. 이 때 소현세 자를 비롯하여 거의 50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심양으로 가 생활하였다. 당시 심양의 조선인들은 모든 면에서 청나라 사람에 비해 열등한 상태에 놓였던 이른 바 소수자였다. 그들은 어떠한 권력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조선과는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청나라의 이질적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야하는 처지였다. 숭문 정신을 중시하 던 조선인들은 상무 정신을 중시하던 청나라 문화를 그대로 따라함으로써 전쟁, 사냥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생활 의식이나 법에 있어서도 청과 조선은 매우 달랐다. 특히 자식이 누구를 따 르는가 하는 문제는 향화인 쇄환문제와 직결되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이른바 종부적(從父的) 사고방식과 법이 있었고 조선에는 종모법 이 있었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람들은 향화인 자손까지 쇄환 대상으로 여긴 반면 조선인들은 향화인만 쇄환 대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문제는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 는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력은 상대적으로 미약했으므로 심 양의 조선인들은 청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도 못하였다. 한편 심양 조선인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던 것은 언어장벽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도망 포로를 잡아 돌려보내는 일에도 차질이 생겼다. 또 같은 어휘를 다른 의미로 쓰면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황제 시녀로 여기(女妓) 나 주탕(酒湯)을 보냈다. 청나라에서 이 단어는 성매매 여성인 창기(娼妓)라는 의미 로 쓰였다. 이에 황제 시녀로 조선의 창기를 보냈다고 오해하기도 하였다. 이는 단 순한 언어 장벽으로 인한 오해에서 그치지 않고 청 황제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사 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심양의 조선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 기도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청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의 우세를 빌미로 조선인 들을 경제적 착취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인들은 힘의 열등 관계에 놓인 까닭에 청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경제적 상황은 더 열악해져 갔다. 이러한 힘의 열세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내부적 문제에도 청인들 이 간섭하여 해결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일들은 심양에 있던 조선인들이 소수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양상이었다. 이런 면에서 『심양장계』, 『심양일기』는 다문화 시 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 사회 속에 있는 소수자들의 삶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낯선 청국의 조선인-소수자 처지로
3. 청국 생활 양상
3.1. 이질적 문화 및 생활의식의 일방적 수용
3.2. 언어 장벽으로 인한 마찰과 갈등
3.3. 다수자 청인의 경제적 압박과 착취
3.4. 소수자 조선인 내부 갈등과 청인의 간섭
4. 나가는 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