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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지리산권 영·호남 지식인의 향촌교화 활동

조선 후기 구례향교의 양반유생과 교육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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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banyusaeng and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at Gurye Hyanggyo in the Late Chosun Period

윤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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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Yangbansajok of Gurye County made Cheongkeumrok (a roster of the Confucian Yangban students) in the 17th century and tried to distinguish themselves from Kyosaeng. SeongKwan (surnames and clans) of Cheongkeumyusaeng were Jeju Ko, Haeju Jeong, Cheongju Han, Kimhae Kim, Cheonju Yi, Gurye Chang, Cheonju Choi, Haeju Oh, etc. These Seongkwan put their names on most Hyangahn (a roster of local Yangban) and wielded their power as Yangbansajok in Gurye County. Yangbansajok made Cheongkeumgyeahn instead of changing Cheongkeumrok and monopolized Gurye Hyanggyo in the middle of 19th century. SeongKwan such as Jinju Kang, Changtaek Ko, Kimryeong Kim, Suwon Baek were excluded in Ibkyeokahn (a roster of successful candidates) even if they passed the Saengwon-Jinsa exam. Gurye Hyanggyo was the local institute which represented the interest of Yangbansajok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Kwonhakjeolmok (orders of education) was announced around the nation and was conducted as a way to strengthen education in 1742. Another Kwonhakjeolmok which had similar content was announced in Cheollado in 1745. Myeonhunjang (appointed small village teachers) gathered students at Seodang (primitive village school) which was prepared by local officials. Yangbansajok did not respond to the educational policy which dictated voluntary participation and enforced local officials to take charge of education. It was difficult to hold continual Kanghoe (academic conference) because of chronic financial difficulties. So instead of Kanghoe, the writing contests were conducted under the supervision of local officials until the late Chosun Period.

한국어

구례의 양반사족들은 17세기에 청금록을 만들고 평민교생(서재교생)들과 구별하였다. 청금유생이 되는 성관은 제주 고, 해주 정, 청주 한, 김해 김, 전주 이, 구례 장, 전주 최씨, 해주 오씨 등이었으며, 이들 성관은 대부분 향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이 구례에서 양반사족으로 위세를 떨친 성관들이었다. 19세기에 이르면 구례향교에서도 더 이상 청금록이 작성되지 않았다. 양반임을 입증하려는 노력에 따라 청금유 생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청금록을 작성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라의 명령으로 청금록에 향족, 서얼들이 허용되자 청금록은 더 이상 양반사족임을 대변해주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구례의 양반사족들은 청금록 대신 청금계안을 만들어 향교를 독점하였다. 청금계안은 이전 청금록에 입안된 사 람들의 자손 가운데 교임을 역임한 사람들만이 자격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함양 박, 함평 이, 영천 이, 탐진 최씨 등 새로운 성관들이 청금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다소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 합격한 사람들을 기록한 입격안을 보면, 진주 강, 장택 고, 김령 김, 수원 백씨 등 청금록이나 교임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성관들은 생원 진사에 합격하였지만 제외되었다. 구례향교는 19세기 말까지 양반사족들의 중요한 활 동근거지로 존속해 왔으며 경제력과 학식을 갖추고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세력에게는 쉽게 참여를 허락하 지 않은 향촌기구였다. 나라의 교육정책이 교관을 파견하는 것을 포기하고 수령의 감독 하에 교육을 하자는 방향으로 전환하였고, 이러 한 추세 속에서 전주감영에 希願堂이 설립되었다. 구례에서도 1704년에 향교 옆에 양사재를 설립하였다. 1731년에 경상감사 조현명이 만든 「권학절목」이 전국에 반포되었는데, 이는 교육체계와 행정체계를 결합시켜 향교 교육을 강화하려는 방침이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권학절목이 1745년에 전라도에 재차 반포되었고, 구례 에서는 면훈장이 관에서 마련한 서당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권학절목대로 교육을 전개하려면 많은 재정 이 소요되는데, 1745년과 1765년에는 수령이 향교의 재정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과 향교 재정을 가급적 향교 교 육에 쓰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양반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수령의 교육 관장과 책임만을 강요하는 정도의 교육정책은 양반들의 큰 호 응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만성적인 재정부족을 겪고 있는 향교에서 지속적으로 강회를 열기는 어려운 일이었 다. 그리하여 강회 대신 자주 실행된 것이 백일장, 순제와 같은 글짓기 교육이었다. 실제로 구례에서는 19세기말 까지 수령이 개설하는 백일장이 자주 이루어져 향교 교육을 외형적이나마 이어나갔다.

목차

I. 머리말
 II. 구례 양반사족과 청금록
 III. 「권학절목」과 교육활동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윤희면 Yoon, Hee-myeon. 전남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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