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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風諡号撰定者・淡海三船 - 『懐風藻』に見える諡号を中心に -

원문정보

Selection of Chinese who posthumous title, Omino Mifune ― Around the posthumous title that appears in “Kaifuso” ―

한어 시호(諡号) 의 찬정자・淡海三船 ― 『회풍조』에 보이는 시호를 중심으로 ―

真野友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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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study of Chinese posthumous title selection, a theory Urabe Kanekata period and the end of that was Emperor Jinmu heaven uniform selection is Omino Mifune in the “Shakunihongi” became the first look. Seen preface deployment by new theory and the old theory, but Omino Mifune theory was established theory of the selection of Chinese who posthumous title. However, it is referred to as Tenpyo year reputedly being the unknown yet respect the emperor was selected and established selected date. Posthumous title of Shotokutaishi, Empress Jingu, Monmu Emperor, that is Chinese posthumous title of Prince, Emperor, Empress is used for the “Kaifuso”. The editors is a Omino Mifune the same person as the selection’s posthumous name. That the Chinese posthumous title of Emperor Monmu first appears earlier than the established time of posthumous selection of commonly accepted theory has been writing in 751 years “Kaifuso” is presented as an issue. First, posthumous title of Shotokutaishi revealed evidence has been presented for example the posthumous title of Chinese, by way of example, in “Ryonoge” of “Kusiki heishutuzho Emperor’s Chinese posthumous title” and “Koki”. In addition, Empress Jingu is referred Omino Mifune has been selected originally, but by focusing on the relevance of money or the name of the era due to the influence of China and title of other looks “Kaifuso”, the era Bushu was analogy did you representation a representation of “Kojiki” in reference to “Jingu” is the year also is. Finally, leading in the direction that you accept the Chinese initiative’s posthumous title of Fujiwarano Fuhito by Kurokawa For Monmu Emperor.

한국어

사전에 의하면,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초기의 천황은 많이 일본식 시호를 칭했지만, 성무천황 이후는 한자 2글자가 된 한어 시호도 늘어났다고 설명한다. 또한 성무천황이전의 천황의 시호는 오오미노미후네에 의해 추호되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한어시호의 성립 시기나 범위 등은 반드시 명확한 것이 아니다. 본 논문은 우라베카네요시의 오오미노미후네에 의한 한어시호 찬정설을 기초로 하여 『회풍조』에 보이는 성덕태자・진공황후・문무천황의 시호에 관하여 검토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서는, 먼저 선행 문헌을 흐름을 파악한다. 특히 사카모토다로씨의 주장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자세하게 분석한다. 이 선행 연구를 근거로 하여, 천황 시호의 찬정 시기보다도 먼저 존재하고 있었던 『회풍조』에 한어 시호가 사용되어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한어 시호 찬정자인 오오미노미후네와 『회풍조』의 편찬자가 동일인물이라고 하는 상관으로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성덕태자의 시호에 관해서는 『령의해』 「공식령평출조천황시」의 『고기』의 예시와 같이 이미 「성덕왕」이라는 한자 표기의 시호를 근거로 하여 오오미노미후네가 성덕태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성덕」과 「태자」의 조합으로 불리고 있으나, 살펴본 바와 같이 천평승보3년 『회풍조』에 보이는 첫 번째 자료와, 보귀6년 「대안사비문」에 보이는 두 예 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진공황후의 시호는 통설에 의한 오오미노미후네의 선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중국대륙의 영향과 그 관련성이 있다고 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주시대의 연호인 진공을 참고로 하며 『고사기』의 묘사를 표상으로 진공라고 기록했다고 생각되어 진다. 오오미노미후네는 『회풍조』에 지통천황, 「대안사비문」에 제명천황 표기를 태후라고 존칭한 표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오미노미후네는 그 시점에 있어서 여성 천황에 대해서 개념적인 사상에서 존칭에서만 표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문에 보이는 진후의 호칭은 일제 찬정했을 때 붙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마지막으로, 문무천황에 있어서는 필자는 구로카와의 후지와라노후히토 한어시호 발의자에 동의한다. 자료상, 후지와라노후히토가 문무천황이라는 시호를 붙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율령격식에 근거하여 제도를 만들었던 문무천황을 옹립한 성과와, 진귀5년 대학에 율령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을 만들어 제도개혁이 계속된 것은 간접적인 증거라고 생각 된다. 한어시호 찬정설 이전부터 『회풍조』이나 『무치마로전』과 같은 사서에 당나라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율령제도에 있어서의 대학에서의 명경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목차

Ⅰ. はじめに
 Ⅱ. 先行研究の流れ - 「列聖漢風諡号の撰進について」の検討 -
 Ⅲ. 懐風藻序文に見える聖徳太子と神功皇后の諡号
 Ⅴ. 懐風藻目録に見える文武天皇の漢風諡号
 Ⅳ. むすびに
 參考文獻
 <要旨>

저자정보

  • 真野友恵 新羅大学校 日語日文学科 助教授, 日本古典文学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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