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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쉬나메> 연구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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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Kush-Nameh

고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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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어

신라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페르시아 고대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출현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에 족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11세기에 집필된 <쿠쉬나메>에 7세기 중반 무렵의 페르시아 와 신라를 잇는 내용이 포함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페르시아가 아랍 이슬람 국가에 의해 멸망하자 왕자 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거기서도 신변의 위협을 받아 신라에 이른다. 신라의 공주와 결혼한 다음 2세를 낳아, 함께 페르시아 회복을 꿈꾸며 귀국한다. 이런 이야기의 중심 무대가 신라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 우리에게 충격이다. <쿠쉬나메>의 출현은 산발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두 지역의 교류양상을 본격적으로 다뤄볼 기회를 주 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하였다. 첫째, <쿠쉬나메>가 발견되고 국내에 소개된 과정. 둘째, 그동안 논의된 신라와 페르시아 사이 교류의 양상. 셋째, <쿠쉬나메>에 그려진 신라 풍속의 정합성(整合性) 여부. 특히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신라의 고대 풍속을 재구할 수 있는 자료와 비교하여, <쿠쉬나메>에 나타난 신라의 풍경이 과연 신라-페르시아 간 직접적인 교류의 결과인지 따져보았다. 신라에 대해 <쿠쉬나메>에서는 두 개의 마친 가운데 다른 하나요 섬이라고 하였다. 신라가 반도인 것 이 고대인에게는 섬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 섬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는 매우 좁아서 두 사람조차 도 함께 통과할 수 없습니다.”라는 묘사가 그렇다. 거리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에서 “모든 정원은 튤립 으로 가득했고, 튤립들은 향기로웠다. 모든 길과 장터는 잘 단장되어 있었고, 벽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 다. 그 돌들은 정교하게 쌓여 있어서 돌기둥 사이로는 아무것도 지나갈 수 없었다.”는 것은 신라 제49 대 헌강왕 때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 다. 거리에는 연주와 노래 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주었다.”고 한 󰡔삼국유사󰡕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아비틴과 태후르가 폴로 경기를 벌이는 대목 또한 주목된다. 이것은 김춘추가 그의 강력한 후원자 김 유신과 축국(蹴鞠)을 하였다는 기록과 연결된다. 한편 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의 고대사에서 국제결혼은 그다지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만 해도 13가지의 국제결혼담이 실려 있다. 이 같은 결 혼담은 전승하는 설화를 그대로 채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하겠으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확대된 해석을 해 볼 수도 있다. 곧, 빈번한 국제결혼이 그다지 큰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지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결혼 풍속을 나타내는 기록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경문왕(景文王)이 아직 등극하기 이전, 곧 응렴(應 廉)이라는 이름의 화랑이었을 때, 헌안왕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 과정에서 헌안왕은 응 렴에게 두 딸을 두고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런 풍속이 널리 퍼져 있었는지, 이 자료 하나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예가 <쿠쉬나메> 속의 결혼 과정과 유사한 점을 주목하게 된다. 신라 왕 태 후르도 아비틴에게 자신의 딸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쿠쉬나메>에 보이는 신라의 풍속과 풍경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 좀 더 많은 자료를 통해 살펴보 아야 한다. 이를 통해 신라와 페르시아의 교류사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 세 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영향 또한 강하게 남아 있다. <쿠쉬나메>는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 계자로서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일본어

新羅と係わる内容を記したペルシア古代敍事詩クスィナメKush-namehの出現は、学界の気を引くのに充分だった。これを通じて私たちは、11世紀に執筆されたクスィナメに、7世紀中盤頃のペルシアと新羅を引き継ぐ内容が含まれたことを確認した。ペルシアがアラブイスラム国家によって滅亡すると王子は中国に亡命して、そこにも身近の脅威を受けて新羅に至る。新羅の王女と結婚して子供を生んで、一緒にペルシア回復を夢見ながら帰国する。こんな話の中心舞台が新羅ということ一つだけでも私たちに衝撃だ。クスィナメの出現は散発的に申し立てられて来た両地域の交流様相を本格的に扱って見る機会を与えた。この文では、まず次のような論議を進行した。第一、クスィナメが発見されて国内に紹介された過程。第二、その間、論議された新羅とペルシアの間の交流の様相。第三、クスィナメに描かれた新羅風俗の整合性の可否。特に、󰡔三国遺事󰡕を中心に、新羅の風俗を再購することができる資料と比べて、クスィナメに現われた新羅の風景が、果して新羅-ペルシアの間に直接的な交流の結果か。新羅に対してクスィナメでは、二つのマチンの中に一つであって、島だと言った。新羅が半島であることが、古代人には島のように見えたことがある。「その島に入って行く唯一の入口は、非常に狭くて、二人までも一緒にパスすることができないです」という描写がそうだ。町の風景を描いた書き入れて、「すべての庭園はチューリップで満ちていて、チューリップたちは香ばしかった。すべての道と市場は、良く飾っていたし、壁は石で作られていた。その石は精巧に積もっていて、石柱の間では何も突き抜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のは、新羅第49代憲康王の時の「ソウルから全国に至るまで、屋根とつけることが並びにつながって、わらぶきの家はひとつもなかった。町には演奏と歌音が絶えないで、一年中、清い風が吹いて、雨は適当に降ってくれた」という󰡔三国遺事󰡕の記事を思い浮かぶようにする。アビティンとテフルがフォロー競技をする書き入れことも注目される。これは金春秋が彼の力強い後援者キム・ユシンと蹴鞠をしたという記録と繋がれる。一方、新羅を中心に韓国の古代史で国際結婚は、あまり疎い事ではなかった。󰡔三国遺事󰡕にだけしても、13種の国際結婚談が記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結婚談は、伝え受け継ぐ説話をそのまま採録する過程で自然に入っているが、時代的な雰囲気を反映したことだという拡がった解釈をして見ることもできる。すなわち、頻繁な国際結婚があまり大きい拒否感なしに受け入れられた時代だったということだ。結婚風俗を現わす記録も目を注ぐに値する。景文王がまだ即位以前、すなわち応廉という名前の花郎だった時、憲安王の目に入って彼の壻になった。結婚過程で王は応廉に二人の娘のなかで一人を選択するようにした。こんな風俗が広く広がっていたのか、この資料一つだけで定め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このような例がクスィナメの中の結婚過程と類似の点を注目するようになる。新羅の王であるテフルもアビティンに自分の娘たちの中、一人を選ぶようにした。クスィナメに見える新羅の風俗と風景が、ある程度事実に近いのか、もうちょっと多い資料を通じて、よく見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を通じて、新羅とペルシアの交流史が具体的な姿を現わす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13世紀、世界を支配したモンゴルの影響も強く残っている。クスィナメは、作品としてだけでなく、歴史の中継者として意味も持っている。

목차

국문초록
 Ⅰ.머리말
 Ⅱ.<쿠쉬나메>의 출현과 문제의 소재
 Ⅲ.신라인의 페르시아 인식
 Ⅳ.<쿠쉬나메>에 보이는 신라의 풍속과 풍경
 Ⅴ.맺음말
 참고문헌
 일문요약

저자정보

  • 고운기 高雲基.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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