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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李康勳의 민족운동과 六三亭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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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 Movement of Lee Kang-Hun and the Uprising of Yuksamjeong during the Japanese Rule

일제시기 이강훈의 민족운동과 육삼정의거

박종연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32집 2014.06 pp.11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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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Lee Kang-hun was born in a rich family in Gimhwa, Gangwon Province in 1903 and received traditional education as a child. In 1917 when he turned 15, he entered a public primary school in Chelwon-gun and completed the regular curriculum. Witnessing the resistance of people around the nation during March 1 Movement of 1919, he moved to Manchuria in 1920. He stayed 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and moved back to Manchuria after getting disappointed with the faction disputes 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Manchuria, he was devoted to bringing up the younger generation through all sorts of educational activities at Shinminbu(신민부) along with Kim Jwa-jin and others. After the dissolution of Shinminbu, he found that the building of an autonomous and independent nation would be difficult through the education he had pursued and then joined hands with anarchists such as Baek Jeong-gi and Won Shim-chang. In 1933, he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in the middle of planning the assassination of Yu Gil-myeong, the diplomatic minister in China, as a member of Namhwa Alliance of Korean Youths(남화한인청년연맹). In November, 1933, he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at the Nagasaki Court, Japan and put in jail. His sentence was reduced while he was in jail and eventually ended in July, 1942. Claiming that he was a possible candidate for repeated crimes for his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the Japanese Empire put him in preventive detention. He had to serve in a Japanese prison for about 12 years until Liberation in 1945. After serving the Organization of Koreans Staying in Japan as Vice President, he returned to Korea in 1960 and held office as a member of the general affairs committee at Korean Socialist Party. After the outbreak of May 16 Military Coup, he was imprisoned for his activities as a party executive with a reform tendency. He devoted his entire life to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and the Korean people.

한국어

이강훈은 1903년 강원도 김화 출생으로 김화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그가 15세 되던 해인 1917년에는 철원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정규과정을 이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3ㆍ1운동 당시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저항을 목격하고 이에 자극받아 이듬해인 1920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로 이주한 이강훈은 잠시 상해 임정에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당시 임정의 파벌싸움에 실망하고 결국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김좌진 등과 함께 신민부에서 각종 교육활동을 통한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의 해체 이후 그간 자신이 추구했던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 힘들어지게 되자, 백정기, 원심창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계하였다. 1933년 당시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하던 이강훈은 주중 공사 유길명을 암살하고자 계획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1933년 11월 일본장기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수형생활 중 감형을 받아 1942년 7월에 그 형이 종료되었는데, 일제는 그가 민족의식이 극히 농후하여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결국 그는 예방구금에 처해져 19 45년 해방되기까지 약 12년간을 일본의 감옥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후 이강훈은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내고 1960년 귀국하여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5ㆍ16 당시 혁신계 정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되는 등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목차

I. 머리말
 II. 민족의식의 성장과 교육운동
 III. 아나키즘을 통한 무력투쟁
 IV. 옥중생활과 해방으로 인한 출옥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박종연 Park, Jong Yeon. 국가기록원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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