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studying of religious polices and respond of it by the Buddhism in modern Korea. Especially this paper was written focussing on the season of the Korean Empire. The buddhism situation at this season will be able to be determined by this studying. Generally, it is spoken that the Buddhism had been oppressed by Chosun dynasty’s government. However, this situation faced on turning point that is called the open-door. It means that the territory of religions of Chosun dynasty was changed after the open-door. For example, the concept of the freedom of religion entered into Chosun dynasty, and Chosun society was changed into the multiple religion society by the birth of New Religions, and the inflow of Foreign religions. Especially, Japanese Buddhism started to permeate into Chosun cooperating with Japanese imperialism, and influenced to Chosun Buddhism like the removing the ban of entering into the capital of Buddhist monks. However the establishment still had negative sight of the buddhism. The Korean Empire’s religious policies was made on this background. After establishing the Korean Empire, the Rules for operation of the Buddhism and Buddhist temples was enforced. It means that Buddhism policies became moderate, and ensured the independent development of the Buddhism. However, after concluding Eul Sa Neuk Yak,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 made the Rules for Promulgation of Religions. It means that the right of religious polices was robbed by Japan to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 and Sinto became staple religion of the Korean Empire. Some part of Korean Buddhist appropriated to Japanese buddhist, and join forces with them. It was the reason why some Korean buddhist thought that Korean policies of Buddhism became moderate thank to them, wanted to modernize Korean Buddhism. The other part of Korean Buddhist, like Kyoung-Hur, tried to protect the identity of Korean Buddhism.
한국어
본 논문의 목적은 우리나라의 근현대 종교정책 가운데, 대한제국의 불교정책과 그 대응 양상을 파 악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을 당시의 불교의 상황과 그 의의를 파악하고자 한다. 조선 말기까지 불교는 지배층에 의해 노동력과 공납물 제공처로 전락하고, 거의 멸절 직전에 이르 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처능의 상소가 현종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것, 운부가 장 길산 세력과 함께 변란을 도모했다는 것 등은 불교가 나름의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가 풀리게 된다. 이것은 일 본인 승려 사노 젠레이가 김홍집에게 건의한 것을, 김홍집이 다시 고종에게 건의함으로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 불교의 조선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과 일본의 문화 침략의 탐 색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노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는 곧 해제될 상황이었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광무 6년(1902) 4월, 고종은 칙명을 내려 궁내부에 소속된 寺社管理署에서 전국 사찰에 관한 모든 사무를 맡게 했다. 이어서 7월에는 36조 항의 「국내사찰현행세칙」을 발표했다. 「국내사찰현행세칙」은 이와 같이 여전히 봉건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고, 불교의 국가 통제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 동시에, 이전 시기에 비해서 훨씬 완화된 분위기 속에서 불교계의 자주적인 발전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이 「국내사찰현행세칙」은 도첩의 매매, 승려의 사적 알현, 사찰의 뇌물 증여, 관리서 주사의 관명 매매 등 조선왕조의 정치적 부패 로 인해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에서는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발표한다. 이것은 통감부가 강탈한 대 한제국의 국권 가운데 宗務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융희 2년(1908)에는 「寺刹 財産保護令」에 발표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당시 불교계의 사찰 재산 보호에 대한 요구를 국가 차원에서 허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의 불교 정책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 당시 지배층 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수립 이전부터 일본 불교는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를 해금하고, 대한제국 불교계와 유대 관계를 맺음으로서, 대한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흡수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한제국의 불교정책 과 일본 불교의 유입에 대하여, 당시 불교계는 친일적으로 변하기도 하였고, 불교정책과 일본 불 교의 유입을 발판으로 불교를 근대화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으며, 경허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불교의 풍토를 혁신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한제국 당시의 불교정책은 외래종교와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 그리고 多宗敎 상황으로 바뀌는 환경 속에서 이전의 불교정책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교 역시 일본 불교의 침투와 다른 종교와의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고 교단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종교의 근대화의 모습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현재의 불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목차
II. 대한제국의 불교정책의 배경
1. 대한제국 이전의 불교의 위치
2. 일본 불교의 조선 진출과 승려 都城 출입 금지 解禁
III. 대한제국의 불교정책
1. 「國內寺刹現行細則」
2. 통감부령 제45호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
3.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
IV. 불교계의 대응
1. 일본 불교의 대한제국 진출과 불교계의 호응
2. 불교계의 自求 노력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