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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軍禮의 정비와 射禮의 의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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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Ritualized of Royal Archery of early Chosun Dynasty

조선전기 군례의 정비와 사례의 의례화

李旺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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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paper examines the centered on the Ritualized of Royal archery as a national event led to the demonstration of military rites was settled during the early Chosun Dynasty. And aims at considering of traditional of archery a Royal family and high position military people's. It was maintained as an system for both stability of royal family and centralization of government authority. As we know, since ancient times, the performance number of shooting arrows had been reduced in the early Chosun Dynasty. And one more reason is, traditionally Royal family liked shooting archery. For example, King Taejong was very openly shooting archery to inside palace and outside field. He says the archery is a principal element of military persons. Anyhow, to the King Jungjong, many Kings played shooting archery. However, at that time, the Royal archery came from ancient Korea and Kingdom of Koryo. In this historical background, Military rites will be established not just from ancient China. It specially called five manner of rituals. However, the rule of Confucianism to be Government police, archery ritual was declined. It's involved Curriculum of education. And this is related to the who got the new group of government authority. They are young confucianist. From there, the Confucianism manners, were to change of traditional of archery in Early Chosun Dynasty.

한국어

이 논문은 조선시대의 軍禮가 중국 고대의 의례를 답습한 것만이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를 이어 내려오던 전례도 함께 수용되었음을 밝혔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射禮를 들어서 군례의 역사적인 정착과 의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군례는 국가의례인 오례의가 정착되는 성종대에 정비되었다. 군례가 국가 전례서에 공식적으로 오례의 하나로 포함되면서 군사의례가 완비되었다. 그러나 군례의 정비는 중국 고대의 예제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전통적인 부분 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중국의 예제는 『주례』의 오례 구조를 계승하였던 당대의 󰡔개원례󰡕를 도입 하였으며, 삼국시대의 예제를 계승한 고려의 오례 구도를 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례의 기원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 국시대와 주나라 및 당·송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오랜 기간을 통해 정비되고 개선된 의례 형식이 가미되 어 정착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례에 활쏘기가 들어간 것은 조선왕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조선초부터 활쏘기는 왕실은 물론 관료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교적 관점에서 활쏘기가 군자의 덕을 살필 수 있는 의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부분도 있으며, 태조를 이은 국왕들이 왕실내 전통적인 행사로 활쏘기를 이어간 것도 한 요인이었다. 활쏘 기가 習射와 觀射로 정비되면서 점차 의례적인 절차로 규정되었으며 결국 세종대 오례의에 포함되고 성종대 의례로 정 비되었다. 습사와 관사는 射禮儀로 정비된 이후에도 의례적인 시행만이 아니라 국왕들의 잦은 활쏘기에 맞추어 활발하게 거행되 었다. 다만 성종대 성균관 대사례가 정비된 이후 왕실의 활쏘기는 축소되었다. 특히 중종대 이후에는 국가적인 사례의 거행이 드물게 되었으며, 국왕이 활쏘기를 장려하는 것도 조선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이점은 중종대 를 전후하여 문치를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계 진출 이후 벌어진 일이라고 보인다. 중종 재위기간 내 국왕이 주재하는 활 쏘기가 2회만 거행되었다는 점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초부터 왕실의 장기이며 상무기질을 북돋기에 가장 용이한 방안이었던 射禮가 쇠퇴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군례를 소홀히 다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초 군례의 정착과 사례의 정비는 상무적 기상이 강조되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 변화 양상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중종대 이후 잦은 왜변을 거치면서 상 무적인 군례의 시행이나 활쏘기는 권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을 거친 뒤 새로 도입된 명나라의 군제에 맞추어 군례 가 변화되고 새롭게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예가 강조되었다. 결국 조선전기의 군례는 그 정착 과정이 국가의례적 속성을 보이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분히 依例的인 수준으로 변모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점이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될 조선의 딜레마였음은 물론이다.

목차

논문요약
 Ⅰ. 머리말
 Ⅱ. 군례의 기원과 정비
 Ⅲ. 習射와 觀射의 정착과 의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李旺茂 이왕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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