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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菱 金昌熙와 南通 文人 張謇의 交流 - 임오군란 직후 교류척독을 중심으로-

원문정보

石菱金昌熙與南通文人張謇的交流 — 以壬午軍亂之後的尺牘交流為中心

석릉 김창희와 남통 문인 장건의 교류 - 임오군란 직후 교류척독을 중심으로-

千金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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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어

본고는『大陣尺牘』,『石菱受簡』, 『東廟迎接錄』등 자료를 통해 1882년 임 오군란이 발생한 후 조선으로 온 청군의 영접관을 맡았던 김창희와 청군 총독 오 장경의 막료로 있었던 張謇의 교류를 고찰하였다. 김창희는 청군 영접관으로서 조선에 온 종군 문사들과 많이 접촉하였으며 그중에서 특히 장건과의 교류가 밀접 하였다. 장건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두 차례나 조선에 와서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 의 많은 사대부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김창희와의 교류가 각별하였다. 김창희와 장건은 공무집행을 위해 자주 만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시문을 교 유하고 필담을 하고 척독도 주고받으면서 깊은 친분을 맺었다. 특히 장건이 귀국 한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척독을 오가며 서로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근대전환기 조선의 자구책을 함께 모색하며 사상을 교류하였다. 김창희는 장건에게서 조선의 안정과 자강을 도모하는 대안책 「조선선후육책」을 제공받았고, 또 청군 막료 이연호로부터 조선의 부강을 위한 제안 「조선부강팔의」 를 받아 이를 토대로 조선의 자강을 모색하는 「육팔보」를 저술하였다. 「육팔보」 는 장건의 「육책」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조선 현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관점을 덧붙혔으며 자체적으로 조선의 국정 개혁안 여덟 가지를 내놓았다. 그의 경세사상은 여전히 유교의 이상적 치국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수구와 맹목적 개화 두 가지를 모두 비판하고 기존 질서의 제건을 통한 안정적인 부강책을 추구하였 다. 김창희와 장건은 조선문제에 있어 여러 면에서 공동의 관점을 갖고 있었으며 필담과 저술을 통해 상호 교류와 탐색을 하였다. 김창희와 장건의 교류는 19세기말 서구세력의 침략과 확장의 시국에 맞서 한중 양국 지식인들의 고민과 대책, 동아시아적 배경하의 양국 문인들의 문화와 사상의 교류의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이시기 한중 양국의 외교관계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 한 의미가 있다.

중국어

本文通過 『大陣尺牘』,『石菱受柬』, 『東廟迎接錄』等資料揭示了1882年朝 鮮“壬午軍亂”之後, 朝鮮金昌熙與張謇的交流。金昌熙作爲援朝淸軍迎接官, 與隨軍幕僚官員多有接觸, 張謇以淸軍總督吳長慶幕僚, 曾兩次赴朝鮮, 两人 在朝鮮相遇, 密切交流, 结下深厚友谊。 金昌熙與張謇, 雖因公務經常接觸, 但個人交往也甚多, 他們時常有詩文唱 酬, 筆談, 尺牘來往, 張謇回國之後, 仍與金昌熙往來書信, 互通消息。且時値 內憂外患紛亂時期, 金昌熙與張謇共通探索朝鮮的自强策略, 相互交流。 金昌熙著述了關於朝鮮現實改革方案的論著「六八補」, 這是在部分吸收、 採納張謇的「朝鮮善後六策」和李延祜的「朝鮮富强八議」的基礎上, 補充和增 加了他本人對朝鮮問題的解決對策。而他的觀點以儒家治國理念爲基礎, 反 對守舊和盲目逐外, 追求穩定的改善方法, 提出安定富强之策。金昌熙與張謇 通過筆談、著述相互交流和探討,在諸多方面两人持有共同觀點。 金昌熙與張謇的交流, 揭示了19世紀末期面對西方列强的侵略和擴張的時 局下, 中韓兩國文人的共同苦惱和探索, 反映了在相同文化背景下的文學交流 和思想交流, 對于硏究這一時期中韓兩國關係具有重要意義。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만남
 3. 문학적 교류 - 시문 창수와 서적 교류
 4. 조선의 자강책 모색 - 「六八補」와 「朝鮮善後六策」
 5.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저자정보

  • 千金梅 천금매. 中國 南通大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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