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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을 통해 본 長城 유생 奇陽衍의 과거 합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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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Ki Yang-Yeon’s process that until he pass the state examination with letters

간찰을 통해 본 장성 유생 기양연의 과거 합격 과정

권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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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Guemgang head house of Haengju Ki’s family in Jangseong has about 130 letters that passed between father and son in the 1860-70s. People focus on the letter written by Ki Yang-Yeon. He wrote this letter to his father, Ki Yun-Jin, when he was studying for state examination and he was working for the government post. In the letters, he told about news happening in Seoul and about government in some detail besides their personal greetings. He wrote about new events he met very accurately and realistically. And the letters are pretty much related to one another. Even though the letters were private, we can see the society of that time. In the late 19th century, it is generally known that the process of the examination corrupted and was very unstable. The national situations inside and outside of the country also precarious at that time. Moreover it was hard for the people from the countryside to pass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Even if he got a pass, it is way harder to get a high ranking government position. These facts remained intact in Ki Yang- Yeon’s correspondence. Ki was the eldest grandson of the Geumgang head family. He headed to Seoul with his family’s great expectation, then he finally passed the examination with honors after devoting himself to his studies for 4 to 5 years. Through the letters sent from him when he was taking many other examinations, we can see the aspect of the state examination in Joseon Dynasty and rural intellectuals’ attitude coping with the situation.

한국어

기양연 후손 가에는 과거시험 공부를 하면서 부단히 노력했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겠지만, 19세기에 들면 지방 사람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합격의 기회를 주려고 하였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었던 것이고, 자주 시행되는 비정규 시험에서는 서울에 살고 있는사람이 유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양연도 경제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서울에서 유학하며 시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성 균관 생활을 하면서 춘추로 설행되는 도기를 이용하고자 하였는데, 전시나 회시에 직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 어졌기 때문이다. 소과에 합격한 적이 없는 기양연은 대과를 보기 위해선 별시를 통하는 것이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을 보면 1864년 증광시 복시의 경우 이미 합격자가 내정되어 있었으며, 지역분배를 하였다지 만 호남지역에 배분된 것은 남인 아니면 소론이었다. 또한 도기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은 모두가 권문세가의 자식들이어서 감히 바라볼 입장도 아니었다. 한편으로 월강고시를 부활하여 면강을 했는데 제대로 응하는 선 비가 거의 없었으니, 시험에 대해 실력은 기르지 않은 채 요행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음도 알 수 있다. 기양연은 이처럼 몇 차례의 시험을 거치고 난 후 식년시에서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지방출신이 비록 합격을 한다고 해도 관직생활은 세도가나 문벌가 출신들과는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방출신 합격 자 대부분은 낮은 관직을 전전하다가 그만 낙향하는 것이 순서였던 것이다. 기양연의 관직생활도 예외는 아니 었다. 그의 편지에서는 잦은 향관(享官) 차정 소식과 이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지방출신인 기 양연에게 벼슬길은 애초에 막혀있었던 것이다. 합격자의 과잉 수급과 함께 권문세가 자손들이 일찌감치 높은 직위를 차지하게 되어 일반 합격자는 낮은 관직마저도 얻기 어려웠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기양연과 왕복간찰의 특징
  1. 장성 幸州奇氏와 기양연
  2. 기윤진-기양연 부자간 왕복간찰의 특징
 Ⅲ. 19세기 후반의 科擧실태와 반응
  1. 빈번한 설행과 합격 열망
  2. 관행화된 과거 행태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권수용 Kwon, Su-Yong. 조선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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