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论朝鲜士林与朝宗岩思明文化的关系

원문정보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hosǒn Confucians and Jojongam Culture

론조선사림여조종암사명문화적관계

石少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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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Jojongam culture came into being around the dense cultural circumstance of revering Zhou Dynasty and yearning towards Ming Dynasty during Chosǒn period. Jojongam culture showed Chosǒn Confucians’legitimism that regarded emperors and disdained barbarians as well as their exigent requires for efficaciously withstanding foreign aggressions. During the hypersensitive periods of Qing-Chosǒn relations, it was fearless for the Three Confucians to copy by carving upon Jojongam in order to express Chosǒn Confucians’sentiments of yearning towards Ming Dynasty. The original form of offering sacrifices for Ming Dynasty on Jojongam was founded on interim altar instead of normal shrine. This simple form foremost combined the seeming memories of carving with Confucian sacrifice culture so that it could be considered as the inchoation fiesta for revering Ming Dynasty of Chosǒn Dynasty. Although Datongxingmiao was founded by descendants of people from Ming Dynasty, Chosǒn Confucians had always protected Jojongam culture in their own way. Jojongam culture was managed by nongovernmental power, but it actually was affiliated to Chosǒn Confucians’ political fates. It used to benefit from Confucians' dominion times, and also acted as a psychic banner while Confucians declined into political lurch. Especially, by coming through the changes from closing down to resuscitation, Jojongam culture had been more boosted by Chosǒn Confucians. Although Chosǒn Confucians could not retrieval their declining tendency in politics by strengthening legitimism ideology, we could clearly see that Jojongam culture was not just a symbolistic sign of Chosǒn’s reins of revering Ming Dynasty, but also had practical political value and heart-stirring psychic significance for Chosǒn Confucians.

한국어

조선시대 존주사명(尊周思明)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조종암의 사명문화 (思明文化)는 조선 사림의 정통의식과 자강불식의 절박한 마음을 반영한다. 청과 조선의 양국관계가민감했던 시기, '삼처사(三處士)'는 조종암에 명나라를 향한 그리움을 글로 새기는 과감한 정치적 용기를 보여주었다. 사당 대신 제단을 쌓아 명나라를 제사하는 방식은 비록 그 형식은간단하지만 암벽에 새긴 글자의 심상과 유가의 제사문화를 결합해 조선왕조가 명나라를 제향한는 시원이 되었다. 대통행묘(大统行庙)는 명나라 유민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조선 사림, 특히지방 유림이 이를 수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종암 사명문화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종일관 조선 사림의 정치적 운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림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던 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정치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정신적 힘이 되어 주었다. 특히 조선말 훼철과 재건에 이르는 일련의 시련을 겪은 후, 존주의옛 자취로서의 조종암문화는 한층 더 사림의 존숭을 받았다. 조종암 문화를 통한 의리정신의고취가 사림의 정치적 쇠락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조종암 사명문화가 단순히 명나라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사적 표상만은 아니었다. 조선사회 특히조선 사림에게는 현실적인 정치적 가치와 함께 발분도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목차

국문요약
 序言
 1、朝鲜王朝尊周文化与三处士凿壁思明
 2、“以坛代庙”的出现与朝鲜士林对朝宗岩思明文化的守护
 3、士林在朝鲜末年朝宗岩停享风波中的角色
 4、结论
 参考文献
 Abstract

저자정보

  • 石少颖 석소영. 中国ㆍ山东大学․历史文化学院讲师。本文得到山东大学2012年度自主创新项目资助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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