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창녕 계성고분군의 성격과 정치체의 변동

원문정보

A Study on the Nature of the Gyeseong Tombs and the Movements of Political Bodies in Changnyeong

하승철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영어

Ancient Changnyeong consisted of the Gyeseong district which contains the Gyeseong and Yeongsan burial grounds and the Gyodong district comprising the Gyodong and Songhyeondong tombs. The Gyeseong tombs can be divided into five groups according to their distribution and time of construction. The Gyeseong tombs were initially established in the 4th century. Judging by their density and size, it is very likely that they must have formed the central tomb cluster of the 4th and 5th century. The pottery style of the Gyeseong tombs belongs to that of 5th century Silla. The Gyeseong tombs evidence two phases: the stone chamber tomb of the 5th century and the stone chamber tomb with tunnel entrance of the former half of the 6th century. The movements of the groups that built the Gyeseong tombs were examined through pottery style, tomb style, and gold artifacts. As a result, it can be suggested that Changnyeong may have been under the influence of Silla from the former half of the 5th century. It is possible that the tombs of Gyodong and Songhyeondong, which emerged as the central tomb cluster of Changnyeong in the 6th century, may have been newly reorganized to form the central burial ground of the political elites. The political elites came from the entire area of Changnyeong, and it must have been Silla that planned or assisted this move.

한국어

고대 창녕은 계성고분군과 영산고분군을 포함한 계성지구와 교동·송현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교동지구로 구 성되어 있다. 계성고분군은 고분의 축조시기와 분포를 통해 5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는데, Ⅰ군·Ⅱ군에서 Ⅲ군·Ⅳ군으로 고분군이 이동되는 현상은 정치체의 큰 변동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계성고분군은 늦어도 4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4~5세기에 지역의 중심고분군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이해된다. 계남리 1·4호분을 포함한 대형 고총들이 축조되는 시기는 고분의 밀집도, 고총의 규모로 비교하면 교동지구에 비해 열세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분문화의 연속성으로 보면 4~5세기 창녕지역의 중심고분 군은 계성고분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교동·송현동고분군이 중심고분군으로 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계성고분군의 토기양식은 고식도질토기 단계와 신라양식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고식도질토기 단계는 4세기 ~5세기 1/4분기에 해당하며, 신라양식에 속하는 시기는 5세기 2/4분기부터이다. 신라의 소지역 양식에 속한 창녕양식 토기는 6세기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러한 변화는 대구, 성주, 상주, 부산 등 낙동강 東岸 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므로 신라 지배방식의 변화와 연동될 가능성이 높다. 계성고분군의 묘제는 2번의 획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1기는 석곽묘 축조기이며, 2기는 횡구식석실묘 축조기 이다. 2기는 장방형계 횡구식석실묘 축조기와 방형계 횡구식석실묘 축조기로 세분된다. 토기양식, 묘제, 금공품 등을 통해 계성고분군 축조집단의 동향을 파악해 보면, 4세기~5세기 전엽은 독립된 소국의 시기이나, 5세기 후반 부터는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창녕의 신라화 과정을 보 면 5세기는 간접지배의 시기로 볼 수 있고, 6세기는 직접지배의 시기로 이해된다. 6세기에 창녕의 중심고분군으로 부상한 교동·송현동고분군은 정치 엘리트 중심의 묘역으로 새롭게 재편되었 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 엘리트들은 창녕지역 전역에서 이주하였을 것이며, 이를 기획하거나 조력한 세력은 신라였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계성고분군의 분포와 편년
  1. 고분 분포현황
  2. 계성고분군의 토기양식
  3. 계성고분군의 묘제
 Ⅲ. 창녕양식 토기의 교류를 통해 본 대외관계
 Ⅳ. 계성고분군 정치체의 변동
  1. 시기별 동향
  2. 계성고분군의 위상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하승철 Ha Seungcheol. (재)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