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objective of this article is to investigate and analyze the ancient Japanese swords on which the Chinese characters were carved and Five King Yamato Wa in the 5th Century. So far, not many things are known about the ancient Japanese swords on which Chinese characters were carved in the 5th Century : the Seven-branched sword, the Sword of Inaridai ancient tomb No.1, the Sword of Inariyama ancient tomb, the Sword of Eta-hunayama ancient tomb. Of these swords, when we exposed the Seven-branched sword to X-ray irradiation, we could read that it was made on November 16. Therefore, we could understand that it was made in 408 A.D., the 4th year reigned by King Junji in Baekje. Nevertheless, still the Japanese academic circle denies that the Seven-branched sword was made in Baekje in the 5th Century. On the other hand, the Japanese academic circle admits the Sword of Inariyama ancient tomb and the Sword of Eta-hunayama ancient tomb was made in the 5th Century. However in this study philological and archaeological analyses showed that the Sword of Inariyama ancient tomb and the Sword of Eta-hunayama ancient tomb was made in the 6th Century. It represents the limitations of Japanese congnition regarding Japanese history of the 5th Century.
한국어
本考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刀劍類 銘文 등 金石文의 분석을 통해 5세기대 왜왕에 대해 갖고 있는 통설적 인식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宋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료에는 5세기대에 讚, 珍(彌), 濟, 興, 武라는 왜왕이 등장하지만, 이들 왜왕의 계보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나오는 천황의 계보와 일치하지 않고 있어 현재까지 이들 倭 5王을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어느 천황에 비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왜 5왕의 비정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金石文과 관련해서는 石上神宮 七支刀 銘文의 ‘倭王旨’를 人名으로 보아 倭 5왕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倭王旨’를 人名으로 보기 어려우며 이는 백제의 헌상설을 전제로 한 해석과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인식에 불과하다. 七支刀 명문의 분석을 통해서는 5세기대의 금석문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69년이라는 통설적인 인식 속에서 七支刀의 명문을 해석하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稲荷台1號墳의 鐵劍 銘文을 통해서도 고분의 조성연대를 5세기 중엽으로 판단할 때 濟일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나 王名이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稲荷山古墳의 鐵劍과 江田 船山古墳의 大刀는 그동안 銘文에 나오는 獲加多支鹵大王을 雄略과 武에 비정하여 雄略의 시대인 5세기말 당시 九州에서 東國의 武藏 지방까지 大王의 지배력이 미쳤다는 설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문헌의 분석을 통해서도 471년을 武의 치세로 보기 힘들며 銘文에 보이는 ‘治天下’와 같은 天下觀은 倭王 武의 上表文의 인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고학적인 분석에 있어서도 고분의 조성연대와 이들 刀劍의 부장 시기를 6세기로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獲加多支鹵大王을 雄略이나 武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七支刀의 銘文과 倭王
Ⅲ. 稲荷台1號墳의 鐵劍 銘文과 倭王
Ⅳ. 稲荷山古墳의 鐵劍과 江田 船山古墳의 大刀 銘文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