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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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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8세기 조선왕조의 문예부흥을 정조와 규장각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 았다. 사실 조선왕조가 이루어낸 조선다운 문화의 형성과 진화는 숙종과 영조대 를 거치면서 진행된 것이지만 정조대를 그 결실의 시기로 보아 정조와 그 문화정 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핵심기관으로 규장각을 살펴보았다. 군사로 자부하던 정조가 선왕인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정책을 계승하면서 왕 권강화를 통하여 사회안정을 도모하고 문화정책을 추진하던 모습은 오늘날의 지 도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왕노릇을 즐기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은 권력을 즐기려는 오늘날의 정치가들에게 따끔한 일침이 될 것이다. 그의 검소한 생활상 역시 특권의식에 젖어 호화생활을 일삼는 오늘날의 사회지도층에게 던지 는 경종이 아닐까 싶다. 조선전기의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립하여 많은 젊은 인재들을 스카웃하여 조 선문화의 초석을 다졌다면 조선후기의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설립하고 초계문신 제도를 통하여 젊은 피를 수혈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재교육을 시키면서 조선문 24 정조와 정조대 제반정책화의 절정기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 저변에는 백성에 대한 애정과 배려, 문명의 세계를 향한,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지도자로서의 열정이 깔려 있었다. 그의 정치의 길은 유교적인 왕도정치였다. 왕도란 덕치로 표현되기도 한다. 패 도와 반대어이다. 힘으로 억누르는 정치, 무력으로 통제하는 정치가 아니라 교화 를 통하여 자율성을 높히고 덕으로 포용하는 정치이다. 교화란 교육보다 한차원 높은 것으로 사회지도층이나 선생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모범을 보임으로서 저절 로 젖어들어 따라하게 하는 것이다. 역할모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교화이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안되면 교화는 불가능하므로 더욱 각성과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인 선비들이 지향한 전공필수로서의 문사철(文史哲)과 교 양필수로서의 시서화(詩書畵)를 차지식층인 중인계층에까지 확산시켜 문화의 저 변이 확대되는 것이 정조시대이다. 더구나 이 중인계층은 당대의 신학문으로 떠 오른 북학사상을 수용하여 다음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시대상황도 고려의 대상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만개하면 지듯이 정조시대를 정점으로 19세기부터 조 선왕조는 사양기에 접어든다. 문화절정기에서 변곡점을 찍은 것이다. 그래서 더 욱 정조와 그의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선도하던 문화정책 추진기관으로 규장각 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규장각은 문화정치의 역할모델로 서 재조명이 필요하고 조선문화를 집대성해 놓은 기록 문화의 보고로서 의미가 있다.
목차
Ⅱ. 정조
1. 성장기
2. 통치기
Ⅲ. 정조대 제반정책
1. 탕평정책(蕩平政策)의 계승
2. 규장각(奎章閣)의 설치
3.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4. 화성(華城) 신도시 건설
5. 서얼허통정책
6. 상업자율화 정책(신해통공)
Ⅳ.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