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한국어
1711년 신묘년 일본 에도성의 오히로마(大広間)에서는 아악공연이 거행되었다. 조선통신사를 위한 환대공연이었다. 일본의 아악은 중국에서 전래되어 큰 변화 없이 전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전승되었다. 아악은 원래 중국 공자묘(孔子廟)의 제례악을 지칭하지만 일본에 전래된 것은 제례악이 아닌 연악(燕樂)이었다. 대륙 전래의 연악을 아악이라 칭하고 일본 국내의 음악과 구분하였다. 일본 아악은 천황가의 궁중음악으로 정착하였으며 점차 대형 신사나 사찰의 의전음악으로 확대되었다. 아악은 음악가 가문에서 전승되어 왔으며 천황가를 중심으로 교토, 나라, 오사카 등 관서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에도시대 즉 근세에 와서는 막부에서도 아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대두되었다. 막부와 천황이라는 정치적 이원체제가 확립되면서 대내외적으로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악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무가(武家)사회이긴 하지만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등장하면서 아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막부의 의전음악[式樂]으로는 이미 사루가쿠(현재의 노가쿠)가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의 아악에 대한 동경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3대쇼군 이에미츠(家光)가 아악인(음악인)들에게 파격적인 대우(토지 수여)를 하였으며, 관서지방(교토, 나라, 오사카)의 아악인들을 에도로 불러와 상주하게 했다. 또 아악인들에게 상예(上藝), 중예(中藝)의 등급을 매기는 과거제도[三方及第會]를 시행함으로써 음악의 실천적 기량을 증진시켰다. 한편 유학의 발달과 함께 예악사상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쇄국정책을 폈던 일본이 조선과의 교류를 강화하였는데 이것이 조선통신사행이다. 조선통신사 특히 신묘사행(辛卯使行) 당시 아악이 에도 막부의 성 안에서 공연하기에 이른다. 아악 공연은 일회에 그쳤지만 당시 유학자이자 정치적으로 실력을 행사했던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유학자였던 그가 조선통신사행을 위한 환대음악으로 아악을 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예악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실천으로서의 아악공연과 그의 예악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일본근세 아악부흥의 배경과 과정을 확인하였다.
일본어
1711年辛卯年、日本の江戸城の大広间の内庭では高舞台を設置し雅楽公 演が行われた。その公演は朝鮮通信使行のための公式的な饗宴であった。日 本の雅楽は中国から伝来して大きな変化なく伝来当時のままに伝承されてきた。雅 楽は本来中国の孔子廟の祭礼楽を指すが、日本伝来されたのは、祭礼楽では なく燕乐であった。大陸から伝来された燕乐を雅楽と称し、日本国内の音楽と区 別した。その雅楽は天皇家の宮廷音楽として定着し、徐々に大型の神社や寺院 での儀式音楽として広まった。雅楽は家代々伝承され、天皇家を中心に主に京 都、奈良、大阪などの関西地方に根を降ろしていたが、近世時代の江戸幕府 においても公演されるようになった。幕府と天皇という政治的な二元体制が確立さ れ、対内外的に幕府の権威を強化するための手段として、雅楽が用いられたの である。江戸時代は武家社会ではあったが、儒学が統治理念として登場すること によって雅楽に新しい転機が訪れた。幕府の式乐として既に猿楽(現在の能 楽)があったが、雅楽の楽人を江戸幕府に常駐させるなど破格的な優遇がなさ れた。楽人たちは芸の上達によって上艺、中艺の階級をもうけ評価したので音楽 の実践的スキルを高める結果になった。統治理念として儒学の発達とともに礼楽思 想への関心も高まった。江戸時代は鎖国政策のなかで専ら朝鮮との交流はあっ た。それが朝鮮通信使行である。朝鮮通信使、特に辛卯(一七一一年)使行 の際雅楽が江戸城の中で公演されるようになった。雅楽公演は一回限りに止まっ たが、当時の儒学者であり、政治的な実力を発揮した新井白石の礼楽思想が 実現されたのである。朝鮮通信使行の賜宴に雅楽が選定された理由は江戸の 京都化という社会的な雰囲気と白石の礼楽思想が大きく作用したに違いない。本稿は朝鮮通信使の饗宴に雅楽公演 と白石の礼楽思想を調べることによって近 世雅楽の復興の一面をみることが出来たと思われる。
목차
Ⅰ. 들어가기
Ⅱ. 신묘년(辛卯年) 조선통신사와 아악공연
Ⅲ. 아라이 하쿠세키의 예악론
Ⅳ. 나오기
참고문헌
日文要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