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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운동 이후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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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ends of Donghak peasant army afte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성주현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30집 2013.06 pp.14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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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After the Donghak Revolution, the trends of Donghak peasant army in Gochang-gun were particularly characterized by peasant uprising in 1898-99. The Heungdeok peasant uprising in 1898 was attributed to oppressive rule of its governor, and in 1899 it aimed to extricate Lee Hwa Sam who was leader of peasant uprising. Lee Hwa Sam who was leader of peasant uprising mobilized the peasants to attack the government office in Heungdeok and ejected the governor from his title. But, after the end of peasant uprising in 1898, in the progress of its settlement an affair, the governor of Heungdeok, tyrannical official, was not punished but Lee Hwa Sam was sent to prison. With the problem of equal field, the peasant’s dissatisfaction went to sharpen. The peasant caused a revolt again to save him, when they were told that Lee Hwa Sam is transferred to another prison, from Gochang prison to Gwangju prison. The Younghakdang, which expended the organizations to Honam,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easant uprising in 1899. Younghakdang, which revolted in Malmok maketplace in Gobu as Donghak Peasant Revolution did, attacked the a government office of Gochang through Heungdeok and Mujang after reinforcing the army by attacking the government office of Gobu. However, since the government office of Gochang prepared thoroughly in advance for uprising and was pouring that time, Younghakdang was defeated in the end. For the leading figures and groups in Heungdeok peasant uprising, there was some different between first and second uprising. The first Heungdeok peasant uprising was led by peasant, although, taken as a whole, it was closely related with Younghakdang. In contrast, the second one was led by Younghakdang, and its leading groups outwardly were ‘Donghakyeodang’, ‘Donghakgudang’ but actually were the forces of Donghak according to using its name ‘Donghak’. Moreover, Younghakdang launched the campaign with ‘promote the national interests and provide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and ‘driving out Japanese and Western’. From this, we can find that Younghakdang which was leading group of peasant uprising in Heungdeok was the new institution of Donghak and that peasant uprising was an extension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re were various types in the trend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after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Gochang. First, it was the renouncement with Donghak. The peasant army in Gochang that participated in Donghak Peasant Revolution had many casualties by war against official and Japanese army, and the survivors cut off more than a little Donghak because of problems of existence. They spent their life vagabondizing, cutting off Donghak, after a life in seclusion in Buan, Byunsan and coming back to hometown. But some of them trained younger students in hometown. Second, they remain to have belief in Donghak. Though they were living in seclusion for a while, they were linked with Donghak believers again and participatied in Progressive Movement in 1904 after decreasing oppression of Japanese Imperialism. After converting to Cheondo-kyo in 1905, they became religious workers in regional diocese such as Gochang, Mujang, Iksan. Third, it was anti-Donghak. They were wealthy local farmers but in the tim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y devoted to Donghak and turned back to it after the Revolution. Moreover, they took the lead in tracking down and suppressing the Donghak army and received public offices.

한국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고창지역의 동학농민군 동향은 무엇보다도 1898년과 1899년의 농민봉기라고 할 수 있다. 1898년 흥덕농민봉기는 흥덕군수의 탐학이 원인이었으며, 1899년 농민봉기는 1898년 농민봉기의 주도인물인 이화삼을 구출하고자한 것이다. 농민봉기의 주도인물인 이화삼은 흥덕군수의 비리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흥덕관아를 습격하고 관인을 빼앗고 군수를 내쫓았다. 그런데 1898년 농민봉기가 끝난 후 수습하는 과정에서 탐관 흥덕군수는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화삼 등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여기에 균전문제까지 겹쳐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심화되었다. 이화삼이 고창감옥에서 광주감옥으로 이감한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이화삼을 구출하기 위해 재봉기하였다. 특히 1899년 농민봉기는 호남 일대까지 조직을 확대한 영학당도 동참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마찬가지로 고부 말목장터에서 기포한 영학당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강화한 후 흥덕과 무장을 거쳐 고창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충실히 방비한 고창관아는 영학당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때마침 몰아친 폭우로 영학당은 패퇴하고 말았다. 흥덕농민봉기의 주도인물과 세력은 1차 농민봉기와 2차 농민봉기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학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1차 봉기는 흥덕 농민들이 주체였다. 이에 비해 2차 농민봉기는 호남 일대의 영학당이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주도세력은 ‘동학여당’, ‘동학구당’, 나아가 겉으로는 영학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동학이라고 하여 동학세력임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학당은 ‘보국안민’, ‘척왜양’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로 볼 때 흥덕농민봉기를 주도한 영학당은 동학의 새로운 조직이며, 흥덕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이후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은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동학과의 절연이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고창지역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내었고, 생존자는 생존의 문제로 동학과 절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부안 변산에서 은신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동학과 절연하고 유랑생할로 보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둘째는 동학을 계속 신앙하였다. 이들은 잠시 은신생활을 하였지만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자 다시 동학교문과 연결되었고 1904년 진보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천도교로 전환된 후에는 고창교구, 무장교구, 익산교구 등 지역교구에서 교역자로 활동하였다. 셋째는 반동학이었다. 이들은 지역의 토호였지만 동학농민혁명 때는 동학에 투탁하였다가 혁명이 끝난 후 반동학으로 돌아섰다. 나아가 이들은 동학군을 색출 탄압하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관직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목차

I. 머리말
 II. 동학농민혁명과 흥덕농민봉기
 III.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군의 동향
 I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성주현 Seong, Joo Hyun. 청암대 재일코리아연구소 연구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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