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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논문: 고려시기 독도ㆍ울릉도ㆍ동해를 포함한 영토 해양 정책과 인식

고려전기 동해안을 둘러싼 고려와 일본의 분쟁

원문정보

A conflict between Goryeo and Japan as for the eastern coast in early Goryeo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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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East Sea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was a high sea shared by Silla and Goguryeo. Since the unification by Silla, she obtained the supremacy of the East Sea and the South Sea. Goryeo became a dominant power of the East Sea rim, which became an inland sea of Goryeo accordingly. The East Sea rim is a sea shared by the Jurchen in the North, and Japan in the East. Thanks to the heightened status of Goryeo, the East Sea became recognized as the sea governed by Goryeo. Huju of North China and Namdang of South China left a record that Goryeo that unified the Later Three Kingdoms, as the head of various Dongyi tribes (North East Asia). It meant that China acknowledge the initiative of Koryeo in North East Asia. Such initiative was exerted based on the East Sea. Ulreungdo and Dokdo are the only islands for the hub of the East Sea. The possession of such islands means the sovereignty of the East Sea. The Japanese recorded Sijosa, a resident of Ulreungdo who fled to Japan in 863 at a time of the unified Silla as ‘a man of small Silla.’ In 1004, an earlier period of Goryeo, there was a record that Jeolgeungyel, a resident of Ulreungdo as ‘person of Ulreungdo of Goryeo’. Japan acknowledged Ulreungdo and the East Sea as the territory of Goryeo and its control.

한국어

고려는 후삼국통일로 동해와 남해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동해는 고려의 內海가 되었다. 고려의 높아진 위상으로 인해 일본과 여진 모두는 동해를 고려가 통할하는 바다로 인식하였다. 이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海東天子가 지배하는 海東天下라는 의식을 가진 고려인의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고려에 대한 중국 쪽의 보편적 인식이 東夷諸國을 지배하는 東夷群長이었다. 고려가 동해․남해의 지배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후삼국통일 직후인 태조 22년(939)에 동해와 남해의 외교적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경주에 설치한 東南海都部署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고려는 이를 동해와 남해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기구가 필요했다. 고려는 東南海都部署라는 전담 기구를 통해 동해와 남해 지배권을 확립했다. 고려의 동해와 울릉도 지배를 입증할 일측 자료에서 통일신라시기인 景文王 3년(863) 일본 丹後國에 도착한 新羅東方別嶋 細羅國人 屎鳥舍의 사례와 현종 7년(1004) 역시 단후국에 도착한 新羅國 迂陵島人 折兢悅의 사례가 찾아진다. 시조사의 사례는 통일신라의 말기까지 울릉도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알려준다. 더욱이 현종 7년 절긍열의 사례는 동해의 도서인 울릉도가 고려의 부속도서임을 일본인들에게 명확히 인식시켜주었다. 동해를 둘러싼 고려와 일본의 분쟁은 현종 10년(1019)년 刀伊賊이 5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對馬島의 金田城과 壹岐의 怡土城을 함락하고 九州의 대재부가 있는 筑前國 基肄城까지 침략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려는 일본에 도이적에 잡힌 포로를 송환한 이후에도 여진해적에 대한 추격과 색출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의 이러한 노력에 의해 여진해적은 격퇴하였다. 고려시기 동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일본과의 영토분쟁은 없었다. 동해의 주요 거점인 울릉도를 포함한 동해는 고려의 內海이기 때문이다. 동해가 고려의 바다라는 사실은 고려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당시 동아시아인들 모두가 상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해를 따라 출몰한 여진해적인 도이적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일본이 국력을 다해 도이적을 몰아내면서 이를 추격할 때도 일본정부는 군대는 물론 민간인들은 고려의 영역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것은 동해와 남해가 고려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동해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기 동해와 울릉도의 문제는 영토분쟁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고려의 지배권과 이에 대한 수호의 문제일 뿐이다.

목차

I. 머리말
 II. 고려와 일본의 동해ㆍ울릉도 認識
 III. 동해를 둘러싼 고려와 일본의 분쟁
 I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김대식 Kim, Dae Sik. 성균관대 박물관 학예실장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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