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socio-economical influence on Zurich by the Swiss Reformer, H. Bullinger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Zurich Christian Community as a reform mechanism of Grossmünster Church- Yim, Do Gun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 sprouted in Germany and continuously permeated into the entire Europe was a great upheaval and it accordingly has left significant legacies not only in religion but in history as well. In the midst of the progress, a prominent Swiss reformer named H. Bullinger made an outstanding footstep of Christian heritage in Zurich, the spiritual-economical center of Europe. He had left many socio-economical changes such as covenant theology, magistrate system, divorce court and reinterpreta tion of usury through his ‘Zurich Christian Community’ in the Grossmünster church. Such a effort of his consequently became the major momentum for the three Protestant countries (UK, Germany and USA) to be spearhead in the new-world-system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Bullinger as the Antistes(*chief priest) representing churches in Zurich and the alter ego of Zwingli had set up the ‘Zurich Christian Community’ through which led entire Swiss Reformed churches for more than 45 years. Unlike the German Lutheran that experienced some theological refractions, his sought market-centered faith comm unity heading for national church communicating with the contempo rary middle class. He also made a close tie with Genevan churches based on the three major Common Confessions such as the First Helvetic Confession(1536), Zurich Consensus(1549) and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1566), through which the Swiss Reformed churc hes expanded their boundary to Hungary, Romania, Italia, Spain, Netherlands, UK and English dependant territory in overseas. He designed a unique type of church named ‘Zurich Christian Community’ orchestrating with two positions; exclusive pastorship to the priests on one hand, discipline of mundane affairs to the magistrates on the other. On this dual system of one body, he made ideal harmony between the local churches and civil government. This system in the Grossmünster church has rooted as a universal criteria for all Swiss Reformed. One of the best performance he made was a magistrate system to take care of all civilians and believers as a whole. To make it realize, he created and administr ated divorce court to enhance women’s right giving them legitimate opportunity to divorce and/or remarry. In accordance with this mechanism, he positively activated market centered economy by reinterpreting usury to make a balance between private profit and common wealth. When all is said and done, Bullinger’s socio-economical thought was designed for the Zurich Christian Community to drive a national church applying both divine law and positive one. The Grossmünster church as an ideal Christian Community has became a typical model of all Swiss Reformed churches. So to speak, his national church based on socio-economical thought remained a universal standard throughout the European Reformed Protestant. This was possible through the Zurich-Geneva church affiliation that was a centrifugal point from which the most popular European protestantism came out.
한국어
스위스 종교개혁가 불링거의 사회ㆍ경제사상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개혁 메커니즘, ‘취리히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임 도 건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전역으로 확산된 16세기 종교개혁은 종교적으 로나 역사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서 당대에 이미 다양한 스 펙트럼의 운동을 파생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유럽의 중요한 사회제 도와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스위스 종교개혁가 H. 불 링거는 16세기 후반 유럽의 관문인 취리히에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보편적 제도화와 지속적인 시민운동으로 성장시켜 온 주역으로서, 그의 노력은 신앙적 이상주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출현과 함께 근대국가의 형성, 개인 의 자율성 강화 및 자본주의의 도래에 일조하였으며, 이는 실제로 프로테 스탄티즘을 제도권 교회로 수용한 영국, 독일, 미국 등이 산업화 이후 세 계체제의 중심국으로 부상하는데도 큰 동력이 되었다. 이에 필자는 시민 정부와 지역교회의 공조체제였던 불링거의 ‘취리히 신앙공동체’가 실시한 사회-경제 사상을 재구성해 보았다. 불링거는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사제이자 취리히 교회를 대표하는 안티스테스(Antistes)로서, 또한 츠빙글리의 분신(alter ego)으로서 모세 의 언약사상을 법고창신한 ‘취리히 신앙공동체’를 개혁교회의 전형으로 뿌 리내리게 하면서 45년 이상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를 대변했다. 이러한 그의 개혁운동은 소모적 교리논쟁으로 신학적 굴절을 거친 독일교회와 달 리, 현실세계와 깊이 소통하는 시장중심적 교회를 추구하였는바, 언약사 상, 정무관 제도, 이혼법정, 고리대금 규제를 통하여 사회개혁을 견인하였다. 이 모든 활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불링거의 ‘취리히 신앙공동체’는 지 역교회와 시민정부가 공조하는 독특한 교회로서, 사제에게는 배타적 사목권을, 정무관에게는 법적 책무와 시민일상의 통제권을 부여하는 이원체제 였다. 특히 시민정부가 교회재산을 전담 관리하던 취리히 신앙공동체는 일종의 국가주의 교회로서, 양 기관의 면밀한 역할분담과 협력을 통해 그 로스뮌스터 교회를 스위스 개혁교회의 표본이 되게 하였다. 이에 대한 실 천방안으로 예배의식의 간소화, 평일예배의 정례화, 그리고 실천적 설교 를 통해 교회조직의 혁신적 변화를 주도하였는바, 이는 제네바 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스위스를 넘어 프로테스탄트의 범-유럽 화를 가속화했다. 그 가운데 가장 눈부신 성과가 정무관 제도였은즉, 그는 이를 통해 취리히 신앙공동체를 국가교회의 전형으로 승화시켰다. 그것의 실천 메커니즘 가 운데 하나였던 이혼법정은 취리히를 최초의 도덕법정 도시로 만들었고 결 혼을 신적 명령으로 강조하였으며, 예외적 경우에 한해, 아내의 이혼청구 권과 재혼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등 여권신장을 이룩하였다. 또한 일상경 제에서도 사익과 공익의 형평성 아래 고리대금을 재해석함으로써 시장 중 심적인 경제활동을 활성화하였다. 요컨대 불링거의 사회개혁은 모세의 언약사상에 입각한 취리히 신앙공 동체를 종교법과 실정법을 동시에 적용하는 국가교회로 실현하고, 이를 제네바 교회와의 대승적 연대를 통해 12개 영방 가운데 4개에 불과하던 프로테스탄트의 지경을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영 국 및 해외 영국령에서 보편적인 사회-경제개혁 운동으로 뿌리내리게 하 였다.
목차
II. 생애
1. 성장기(1504~1521)
2. 개혁활동기(1522~1575)
III. 사회-경제 사상
1. 언약 사상과 취리히 신앙공동체
2. 정무관 제도와 신자의 법적 의무
3. 결혼과 이혼법정
4.고리대금 재해석과 시장 중심적 경제활동
I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