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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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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cedures for the Late King Yeongjo's Funeral(國葬), and the Meaning of that National Funeral, in the Early years of King Jeongjo's reign

이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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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procedures that were prepared for the late King Yeongjo's funeral, which took place shortly after successor King Jeongjo ascended to the throne. Many materials, such as several chapters inside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 couple of Eui'gwe(儀軌) Ritual Protocol Manuals, and a variety of Deung'rok(謄錄) Documents generated by several governmental offices, were consulted for this work. King Yeongjo died on March 5th, 1776, and successor King Jeongjo immediately commenced overseeing of the preparations for the funeral. The National funeral(國喪) for King Yeongjo continued for total of 27 months, and proceeded as dictated by a manual titled Gukjo Sang'rye Bo'pyeon(國朝喪禮補編: Supplemented Edition for the National Funeral Manual) which had been published earlier in 1758 by the order of King Yeongjo himself. During the National funeral, a couple of political incidents that complicated the proceedings occurred, but King Jeongjo involved himself in every step of the preparation, and conducted several crucial stages of the ritual himself as well. As a result, he was able to establish a perfectly justified line of succession from King Yeongjo to the late King Jingjong(眞宗) and to himself. His efforts greatly contributed to the stabilization of his own authority, and to the successful completion of a National funeral which turned out to be quite dynamic than any other funerals in history.

한국어

왕실의 상장례(喪葬禮)와 관련한 연구가 최근 진척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국왕의 국장 전반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직 없다. 그 때문에 관찬 자료 및 의궤, 등록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영조의 국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전거로 하면서, 사례(士禮) 위주인 《주자가례》를 제후례에 맞게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및《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흉례조가 정비되었다. 유교적 예제의 실천이 점차 강조되면서 불교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갔으며, 고려부터 내려오던 역월제(易月制)도 삼년상제(三年喪制)로 변화되어 갔다. 조선후기에는 《속오례의》의 편찬을 거쳐 1758년에 영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으로 왕실 상장 의례가 정비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치러진 영조의 국상은 《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등 세 관찬 자료를 통해 날짜별로 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밖에 국장 당시 작성된 국장, 빈전, 혼전, 산릉, 부묘도감의궤 및 등록, 일기류를 통해 관찬 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국상을 주관했다. 복(復), 거애(擧哀), 역복(易服), 설빙(設氷), 목욕(沐浴), 습(襲), 반함(飯含), 영좌(靈座) 설치, 소렴(小歛), 소렴전(小歛奠), 대렴(大歛), 성빈(成殯), 대렴전(大歛奠)・성빈전(成殯奠), 성복(成服), 사위(嗣位), 세 도감 설치,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 차정, 시호(諡號)・묘호(廟號)・전호(殿號)・능호(陵號) 결정, 산릉자리 결정, 재궁 전체 가칠(加漆), 재궁 상자(上字) 친서(親書), 재궁 결과(結裹), 상시책보(上諡冊寶), 계빈(啓殯), 계찬궁(啓欑宮), 조전(祖奠), 견전(遣奠), 발인(發引), 봉사(奉辭), 노제(路祭), 산릉 성빈(成殯), 하현궁(下玄宮), 망곡례(望哭禮), 입주전(立主奠), 초우제(初虞祭), 반우(返虞), 반우지영(返虞祗迎), 재우제(再虞祭)~칠우제(七虞祭), 졸곡제(卒哭祭), 연제(練祭), 상제(祥祭), 담제(禫祭), 부묘(祔廟)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영조의 국장 절차에서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되었다. 첫째, 영조의 국장이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을 근거로 치른 최초의 국장이라는 점이다. 둘째, 국장 기간 내 《명의록(明義錄)》과 《속명의록(續明義錄)》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자, 영조-진종-정조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표방하고 각종 절차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이 입시한 가운데 정조가 직접 거행함으로써 취약한 왕권을 직・간접적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한 점이다. 셋째, 국장 기간 중 국왕을 비롯하여 집권 세력의 정치성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국장 담당자 및 배향 공신의 선정이다. 영조 국장에서는 여타 국장과 달리 국장을 총괄하는 총호사의 교체가 빈번했으며, 정조의 의지로 송시열(宋時烈)을 효종의 배향신으로 추배(追配)하고 노론계 신임의리를 대표하는 김창집(金昌集)을 영조의 배향신으로 선정했다. 넷째, 영조・정성왕후가 추존된 아들 내외(진종・효순왕후)와 같은 날 함께 부묘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조의 국장은 겉으로 보기에 여타 국왕의 국장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지적한 몇 가지 특징들은 다른 국장에서 보기 어렵고, 그로 인해 여타 국장보다 훨씬 역동적인 측면이 많았다.

목차

요약문
 1. 머리말
 2. 영조 국장 관련 典籍의 소개
  1) 국가전례서의 흉례조와 《국조상례보편》
  2) 의궤, 등록, 일기류
 3. 영조의 국장 절차
  1) 승하부터 발인까지 국장 절차
  2) 발인 후 부묘까지 국장 절차
 4. 맺음말 : 영조 국장 절차의 특징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이현진 Lee, Hyeon-jin.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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