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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年代、崔重珍の自由教会とその周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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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10s, Liberal Church by Choi Joong-jin and its Context

1910년대, 최중진의 자유교회와 그 주변

裵貴得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제40호 2012.04 pp.17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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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1910, Minister Choi Joong-jin gained independence from American missionaries. It took place amid the conflict over the condition of baptism and financial policy between Minister Choi and the American messenger. In the end, he separated himself and his followers from the missionaries speaking for anti missionary and anti ecclesiastical authority. The reason behind their dispute lay in missioners’ strict ban on having a memorial ceremony for ancestors and keeping a concubine. The American ministers did not administer baptism for Koreans who practice memorial service to ancestors and concubinage and it drove many Korean believers to abandoning their faith. For missionaries, the two standards were merely seen as a matter of individual’s choice . For Korean Christians, however, the two conditions meant a lot to them, having something to do with their community. Consider, memorial service to ancestors, for example. Some Korean Christian refusing to pay a tribute to their ancestors had trouble in the family and it led violence and even suicide, becoming a serious social problem. Therefore, Korean Christian considered stop practicing memorial ceremony and concubinage as a step to rebuild themselves as a devout Christian but also a process to separate themselves from their existing community After Minister Choi liberated from American ministers, he joined the Chosun missionary department in Japanese Kumiai Kyōkai, which had little influence in Korea. With the help of liberal church by Choi, Japanese Kumiai Kyōkai grew their power converting more and more Koreans to Christianity.

한국어

1910년 남장로교의 전북대리회지역에서 반선교사와 반교권을 내세워 독립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매계지역를 중심으로 활동 하고 있었던 최중진목사가 미국선교사들의 세례에 대한 자격과 재정에 관한 정책에 대립하던 중, 자신이 맡아보던 교회를 모아서 독립한 자유교회 사건을 말한다. 선교사와 최중진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 할 수밖에 없었던 배 경에는, 선교사들의 축첩과 제사에 대한 엄격한 금지정책이 있었다. 당 시 선교사들은 축첩과 제사를 행하는 조선인 신자에게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금했으며, 축첩과 제사를 포기 할 수 없었던 조선인 신자들 은 이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신앙의 첫번째 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던 제사와 축첩문제는 조선인 신 자들에게 있어 개인의 문제로만 그칠 수 없는 공동체와의 관계성의 문제 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 제사의 경우는 제사를 거부하는 조선인 신자와 이를 이해 못하는 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폭력, 자살등 사회적인 문제 로까지 확산되었다. 즉, 당시의 기독교신자가 제사와 축첩을 단념 한다 는 것은 기존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신앙적 개인으로 자립되어 가는 과 정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존의 공동체에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이 축첩과 제사를 그 배경으로 하는 최중진의 자유교회는 선 교사들에게서 독립 한 후, 당시 조선선교에서 그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부에 가입하게 된다. 그 후 일본조 합교회는 이러한 자유교회를 기반으로 조선에서 신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목차

Ⅰ. はじめに
 Ⅱ.崔重珍の生涯
 Ⅲ.崔重珍と自由教会
 Ⅳ.蓄妾の問題
 Ⅴ.祭祀の問題
 Ⅵ. おわりに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저자정보

  • 裵貴得 배귀득. 日本 立命館大学 博士後期課程。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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