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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인 열암 하시찬의 삶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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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Ha-Shi-Chan(夏時贊)'s Life and Neo-Confucian Scholarship in Late 18th - Early 19th Centry

백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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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the late 18th century, Ha-Shi-Chan(夏時贊,1750-1828) who lived in Daegu, dreamed that pass in the ‘big test (大科)’ and to become a management (官吏). In spite of the adverse society, he exist for 20 years not to study more eagerly, but find someone can help him. He later mentioned that he lead a life of a wanderer during 20 years. And it was not enough to pay for charge to ‘testing ground(科擧試驗場)’ by income from his small farm. When he failed and returned to hometown dragging his fatigued body, there was a poverty with starving family. He became a sophisticated scholar late in his life, however, he did not become a great scholar. And he did not wrote many books during his lifetime, but The book he wrote help us understand about that time.

한국어

이 논문은 조선시대 후기 대구지역 서인노론계에 속하는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의 삶과 학문에 관한 보고서이다. 범 대구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으면서 아직 그 정체가 완벽하게 가늠 되지 않은 대구지역의 서인노론에 대한 실존적 삶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은 조선 후기 대구 유생들의 사회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대구의 서인노론은 어떻게 형성되고 사라지는지, 그들과 기호의 노론과는 어떤 관계였는지, 또 대구지역 남인들과의 관계는 줄 곳 비우호적이었는지, 기호노론과 대구남인을 소통시키는 대화통로 같은 역할이 있었는지, 그들의 지역 유생사회에 있어서 혼반(婚班)관계, 영향력, 경제력 등은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남의 노론 유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적 삶과 학문을 살펴보는 것은 마치 주자가 ‘오늘 한 건을 궁리하고 내일도 한 건을 궁구하기를 오래 하게 되면, 확연하게 저절로 관통할 수 있게 된다. (須是今日, 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然後, 脫然自有貫通處; 『근사록』, 권2 위학류)“ 고 한 것처럼, 수많은 개인사 연구의 축적을 통해서만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최근 17세기 후반 대구 노론 유생인 단구(丹邱) 전극념(全克念)의 생애사를 쓰고 이어 18세기 후반의 대구유생 열암 하시찬의 개인사에 관해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하시찬의 유집 『열암문집』을 보면, 하시찬의 생애는 대략 대구의 평범한 노론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유달리 독서를 좋아하는 소년시절을 보내고, 18세 전후로부터 37세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은 과거에 응시하기위해서 동서로 분주히 쫓아 다녀야만 했는데(=奔走東西) 거기서 아무런 소득이 없자 그동안 농사도 학업도 소홀히 한 후회와 좌절감이 엄습하게 된다. 가령, 34세 되던 해 초(1783 癸卯 ,正月)에 쓴 '처음으로 흰머리를 보다(「初見白髮」)‘ 이란 시에서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문도 게을리 하면서 나이만 먹는 자신에 대해 후회하고, 37세(1786, 丙午年) 의 시 ‘과거를 폐하려한다(「廢科擧」)’에서는 고민 끝에 더 이상 벼슬을 구하는 일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고 과거를 폐하고자 하는 결심을 밝히며, 39세 때(1778, 戊戌年)의 시 ‘양식이 떨어지다(「絶粮」)’와 ‘생계음(「生計吟」)’에서는 극심한 가난을 표현하였고, 39세 때(1788년, 戊申年)의 시 ‘면화 밭을 인마가 손상하였다(「綿田爲人馬損傷」).’ 에서는 면화 농사를 지었는데 놀러 나온 사또 일행이 면화 밭을 짓밟아 버렸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41세(1790, 庚戌年)에 당대 최고 예학자 중 한 사람인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를 찾아가 예학에 관해서 묻고, 이어 당대 성리학 최고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基)에게 성리학에 관해 물어 자신의 학문의 전통을 수립함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스스로 1789년에 건립한 독무암서(獨茂巖棲)에 기거하면서 예학과 성리학에 관해 지인들과 문답하고, 학문을 쌓고, 수양을 닦으며, 저술과 강학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성리사상은 『열암문집』 권4의 「성설(性說)」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고, 예학사상은 『문집』, 권2의 「상경호선생의례문목(上鏡湖先生儀禮問目)」이나 「제자신알변(諸子晨謁辨)」 그리고 단행본인 『팔례절요』 등을 통해서 대강을 볼 수 있다. 그가 당대 예학과 리학의 최고 경지에 오른 두 스승(경호, 성담)이 인정한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학과 성리학 사상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이 없고 그나마 분량도 많지 않아서, 그가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고 증빙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가 50여세 이후 독무암서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저술 『팔예절요』를 통해 강학을 한 후 지역 유생사회의 풍속이 크게 변화되고, 이를 역대 경상감사나 지방수령들이 다투어 칭송해온 것과, 대구 유생들의 그에 대한 존모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가 교육자로서는 분명 크게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구자의 안목으로 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열암문집』을 통해서 스스로 기록한 18세기 후반 대구의 평범한 늦깎이 노론 집안 출신인 열암 하시찬의 진솔된 모습을 통해, 같은 시기 비슷한 형편의 대구의 노론가문 출신의 유생들이 겪어야 했을 - 총명했던 어린 시절, 과거시험에서의 거듭된 낙방, 좌절, 가난 그리고 안빈낙도의 여생 이라는 - 삶의 모습을 실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열암 하시찬의 생애
  1. 하시찬의 가계
  2. 하시찬의 생애
  3. 하시찬의 사승관계 및 교유
 Ⅲ. 열암 하시찬의 학문
  1. 열암의 예설(禮說)
  2. 성설(性說)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백도근 Paeg, Do-Geon. 영남대학교 강사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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