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연구논문

北魏前期 皇室通婚정책-겹사돈婚의 만연과 그 정치적 기능을 중심으로-

원문정보

北魏前期的皇室通婚政策-以親加親婚的蔓延及其政治的機能爲中心

북위전기 황실통혼정책-겹사돈혼의 만연과 그 정치적 기능을 중심으로

최진열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한국어

본고에서 北魏前期 皇室의 혼인정책을 駙馬(公主혼인)와 外戚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北魏前期 部落首領들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정치적․사회적 지배층을 형성한 상황에서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北魏皇帝들은 이들 중 유력 세력을 결혼을 매개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北魏皇帝들은 유목민 집단 가운데 拓跋氏에 충성한 가문들을 대대로 駙馬로 삼아 그들의 충성을 재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졌다. 또 北魏前期 정복전쟁 과정 중에 통합한 胡漢세력을 체제내로 포섭하기 위해 萬氏․乙弗[乙]氏․紇奚[嵆]氏 등 투항한 집단의 수장과 대대로 通婚관계를 맺으며 이들을 皇室의 藩屛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밖에도 北魏는 北魏에 항복하거나 정복된 각종 胡․漢의 유력세력을 駙馬로 삼아 이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다. 심지어 北魏는 당시의 주변국인 柔然․北涼 등에도 公主를 시집보내는 결혼동맹을 추진했다. 이때 반드시 상대방 군주의 누이 등 딸을 취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결혼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인질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北魏와 주변국은 서로 여자를 교환하는 결혼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北魏는 外戚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음 皇位계승자의 生母를 살해하는 子貴母死제도를 채택하여 外戚이 발호하는 현상은 적어도 北魏前期에 는 없었다. 外戚 대신 皇帝의 保母 保太后가 臨朝稱制했지만 保太后 가문의 발호는 없었고, 그 정치적 지위는 保太后 사후 쇠락하였다. 北魏는 子貴母死제도를 통해 外戚의 발호를 견제하였지만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 혹은 공존의 대상으로 보았다. 즉 外戚들을 高官으로 임명했지만 권력을 주지 않는 형태로 우대하였고 外戚의 일원을 駙馬로 삼았다. 즉, 北魏皇室은 公主를 外戚인 姚氏․杜氏․馮氏와 결혼시켜 겹사돈婚을 맺었고, 특히 長樂馮氏는 3대에 걸쳐 公主의 駙馬와 北魏皇帝들의 皇后와 左昭儀를 배출하였다. 이는 外戚을 皇室의 지지세력으로 편입하려는 정략적인 통혼정책으로 볼 수 있다. 또 序紀時代에도 이러한 통혼형태가 빈출하고, 契丹의 外戚인 蕭氏가 대개 皇室인 耶律氏의 공주들과 결혼하는 예를 보면 “外戚=駙馬”, 즉 두 집단의 교차결혼은 유목민 고유의 풍습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비슷한 시기 南朝시기에도 劉宋皇室과 王․徐․江氏의 복잡한 近親婚과 異輩婚처럼 近親婚, 즉 형식상 겹사돈婚과 항렬이 다른 친척끼리 결혼하는 異輩婚이 빈출하였다는 지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南朝와 北朝에서 겹사돈婚이 보이므로 北魏의 현상을 胡族的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南朝의 겹사돈婚은門閥과 家格이 맞는 家門끼리 결혼하는 배타적 通婚圈, 즉 門第婚의 성격이 강하다. 門第婚하에서 소수의 가문이 通婚하면서 겹사돈婚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北魏에서는 孝文帝가 門閥위주의 定姓族과 혼인정책을 실시하기 전까지 胡族지배층 사이에서는 門第婚이 통용되지 않았다. 또 序紀時代에도 外戚, 혹은 駙馬가문과도 世婚과 겹사돈婚이 빈출하기 때문에 南朝 門第婚의 영향이라기보다 序紀時代 유목민의 婚俗이 北魏前期에도 여전히 유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北魏後期 皇室과 駙馬․外戚 사이에는 北魏前期처럼 世婚과 겹사돈婚이 행해졌다. 이는 序紀時代와 北魏前期에 지속된 胡族的 通婚이 여전히 北魏後期에도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외형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北魏後期 皇室의 通婚정책은 外戚의 발호로 北魏前期에 보여준 外戚의 발호와 정치적 부상을 통제, 혹은 견제하면서 外戚을 우대하는 절묘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상실하였다. 이는 子貴母死 관행이 깨지면서 生母가 어린 皇帝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는 관행이 되살아났고, 황제의 신임을 얻거나(高肇) 禁軍을 장악한(于忠) 외척들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北魏後期 皇室과 駙馬․外戚과의 통혼형태는 여전히 胡族的성격을 지녔으나 외척에 대한 견제와 우대라는 정책은 계승되지 못하였다.

중국어

北魏前期部落首領仍然行使权力, 形成政治的ㆍ社會的支配層的狀況下, 北魏皇帝为了統合他们, 以婚姻为媒介收买了他们中的有力勢力。卽, 以拓跋氏为頂点, 拓跋氏和拔拔氏等九个血緣ㆍ或是以擬似血緣形成的帝室十姓形成了北魏支配结构的最上層。为了确保帝室十姓的支持, 道武帝時期把忠誠于拓跋部的穆氏代代封为駙馬, 要以此作为皇室的藩屛。这同样体现在擁立文成帝有功的陸氏家族。如此北魏从序紀時代以來, 就在服屬的遊牧民集團中, 封忠诚于拓跋氏的家族代代为駙馬, 以此确认他们的忠誠ㆍ并加强了团结。并且, 为了把北魏前期征服戰爭中統合的胡漢勢力收买进来, 北魏采取了下嫁公主的婚姻政策, 和萬氏ㆍ乙弗[乙]氏ㆍ紇奚[嵆]氏等投降集團的首長代代通婚, 以此收买他们作为皇室的支持勢力。此外北魏还把投降或征服于北魏的各種胡ㆍ漢的有力勢力封为駙馬编入到支配層内。于是北魏把公主下嫁到有力勢力, 以此把他们收买为皇室的支持勢力, 并下赐他们王爵等爵位, 優待了他们。北魏也把公主下嫁到當時的周邊國柔然ㆍ北涼等, 促进了結婚同盟, 同时也一定要把对方君主的姊妹或女儿娶为後宮。可以看出为了维持婚姻同盟ㆍ互相确保人质, 北魏和周邊國采取了互相交换女人的婚姻形態。
北魏为了牵制外戚勢力, 采取了杀害皇位繼承者生母的子貴母死制度, 因此至少在北魏前期不存在外戚跋扈的現象。虽然皇帝的保母保太后曾代替外戚臨朝稱制, 但是没有出现保太后家族的跋扈现象, 而且其政治地位在保太后死后就衰落了。北魏虽然通过子貴母死制度牵制了外戚的跋扈现象, 但是
没有把他们当作除去的對象, 而是把他们当作相生ㆍ共存的對象。卽, 虽然任命外戚为高官, 但是没有赋予他们權力, 只任命外戚的一員为駙馬。可以认为这是要把外戚编入皇室支持勢力的政略的通婚政策。而且, 序紀時代也频频出现这种通婚形態, 契丹的外戚蕭氏大都和皇室耶律氏的公主結婚, 从这一例子可以看出 “外戚=駙馬”, 卽两个集團的交叉婚姻也有可能是遊牧民固有的風習。当然就象这一时期南朝的劉宋皇室和王ㆍ徐ㆍ江氏複雜的近親婚和異輩婚一样, 频频出现门閥間的通婚现象。相反在北魏孝文帝和門閥爲主的定姓族实行婚姻政策以前, 胡族支配層之间不存在門第婚。而且, 序紀時代也频频出现和外戚或是駙馬家族的世婚和親加親婚, 所以可以说这不是南朝門第婚的影響, 而是序紀時代遊牧民的婚俗一直流行到北魏前期, 这种解释才是合理的。
北魏后期仍象北魏前期一样存在皇室和駙馬ㆍ外戚之间的世婚和重亲家婚。这表明序紀時代和北魏前期的胡族通婚一直持续到北魏后期。但是北魏后期皇室的通婚政策因外戚的跋扈丧失了北魏前期控制外戚的跋扈和政治上浮起, 或是牽制ㆍ优待外戚的絶妙的牽制和均衡原理。这是因为子貴母死慣行打破以后, 生母代替幼皇帝垂簾聽政的慣行复活, 得到皇帝的信任(高肇), 或掌握禁軍(于忠)的外戚在政治全面浮起。因此可以认为北魏后期皇室和駙馬ㆍ外戚的通婚形態仍然具有胡族的性质, 但是对外戚的牽制和優待这一政策却没有能繼承下去。

목차

Ⅰ. 머리말
 Ⅱ. 世婚과 駙馬가문의 藩屛化
 Ⅲ. 외척의 포섭과 견제
 Ⅳ. 餘論 : 北魏後期 皇室通婚과의 비교
 참고문헌
 국문요약
 중문요약

저자정보

  • 최진열 崔珍烈.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 9,400원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