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international exchange and foreign information of Ancient East Asia -in the case of ‘T'angsosik’ reported in Japanese historical data- Lee, You Jin Each country in ancient east Asia was concerned about the collection and transmission of foreign information through the international exchange. three countries in Korean peninsula, namely Koguryo, Backje, Silla, which were organized in tributary royal ordaining system of T’ang, and Japan, which did not ordained by T’ang, has got the foreign information through dispatching Kyondangsa to T’ang. Beside the Kyondangsa, delivery information by the roots of official diplomacy was done by the overseas students and Buddhist priest, who enlarged their acquaintance with the knowledge of the foreign countries during their stay in T’ang and delivered it to homeland. And the foreign envoys, such as Koguryosa and Backjesa, visited Japan and they also delivered the foreign information directly and indirectly. In case of the delivery of the foreign information through the sovereign's messages there was the some of political intention behind the messages, but apart from the sovereign's messages it was also possible to obtain specific information through question and answer directly with envoys. Moreover, the foreign information was delivered by the official trade and exchange of materials. And the private exchange of foreign information, not official exchange, was conducted. The overseas Buddhist priest, as opposed to the overseas students, delivered the foreign information. During this period, we have to look at the exchange of information under the specific situation. After the fall of Backje, Koguryosa, and the Baekchon River Battle, that the exchange of foreign information conducted by the prisoners of war taken by T'ang, and otherwise people of T'ang who taken by Korea and Japan was also seen as the characteristic form of the information delivery during seventh century in East Asia. Similarly, by the eighth century the basic structure of the exchange, collection and delivery of foreign information was almost identical with structure of previous period. But, after eighth century the characteristic form was that debriefing report, which conducted by Kyondangsa when he returned to his country was complicated and standardized from oral report to documentation. The Kyondangsa in other words made a report in detail on collected foreign information through writing ‘T'angsosik’ at the end of the report, as well as consigned the all major issues about stay and homecoming to writing in sequence of date. Moreover, the collection of foreign information through foreign envoys such as Balhaesa, Sillasa information was strengthen, because the new of AnㆍSa’s rebellion was delivered by Balhaesa to Japan 3 years later. But the private and unofficial delivery information was decreased,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With the establishment of statute system, the collection of foreign information by private ways virtually was became impossible except the return of castaways and investigation of hearsay of each country, because individual migrations was became impossible. The exchange and transmission of foreign information was greatly influenced on official diplomacy in ancient east Asia, and each of countries in east Asia was prepared to rules for information management through the statute in order to prevent to leak out information about internal situation and to collect and deliver the foreign information.
한국어
고대 동아시아의 交流와 對外情報-일본 사료에 기록된 ‘唐消息’을 중심으로- 이 유 진 고대 동아시아 각국은 국제교류에 의한 대외정보의 수집·전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唐의 책봉체제에 편제된 한반도의 삼국(高句麗·百濟·新羅)은 물론 책봉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일본 역시 遣唐使를 파견하여 공식외교를 통한 대외정보를 입수하였다. 공식외교를 통한 정보전달은 견당사 이외에도 견당사와 함께 파견된 留學生(僧)이 당에 체류하는 동안의 견문을 통해 대외지식과 정보를 본국으로 전달하기도 하고, 일본을 방문하는 高句麗使나 百濟使 등의 외국사절을 통해서도 직·간접의 대외정보가 전달되었다. 물론 외국사절의 대외정보전달에는 國書를 통한 정보전달의 경우 그 이면에 전달국의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포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국사절이 전달하는 국서이외에도 사절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또한 ‘質’의 공적왕래와 교류에 의해서도 대외정보는 전달되었다. 공식적인 국가적 차원의 교류는 아니지만 민간의 교류를 통한 정보의 전달도 이루어졌다. 留學僧과는 반대의 경우로 渡來僧을 통한 정보전달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특수한 정세에 의한 정보교류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백제·고구려의 멸망과 白村江戰鬪 이후 당으로 끌려간 전쟁포로와 거꾸로 한반도나 일본으로 끌려간 당인의 정보전달, 귀화인(渡來人, 망명자 등)에 의한 대외정보전달 역시 7세기 동아시아교류와 정보전달의 특징적인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세기에 이르러서도 동아시아 각국의 교류와 대외정보의 수집·전달의 기본구조는 전시기와 거의 동일한 양상을 나타낸다. 다만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형태는 견당사가 귀국 후 행하던 復命報告가 기존의 口頭報告에서 8세기 후기부터는 文書化되어 복잡화·정형화하게 된다. 즉 견당사는 출발에서 당에 체류, 귀국에 이르기까지 행한 중요 사안에 대해 날짜별 문서보고는 물론 말미에 ‘唐消息’이라고 하여 수집한 대외정보를 상세히 보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사의 난의 소식이 일본에는 3년이나 늦게 발해사에 의해 전달된 것을 계기로 渤海使, 新羅使 등 외국사절을 통한 대외정보수집 역시 강화되었다. 그러나 개인이나 민간에 의한 정보전달은 전시기에 비해 감소하였다. 율령국가의 성립으로 법제상 개인의 이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표류민의 방환이나 각국의 풍문을 검토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민간으로부터의 대외정보수집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와 대외정보전달은 공식외교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고, 동아시아 각국은 대외정보의 수집·전달은 물론 자국의 정보가 국외로 흘러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율령을 통한 정보관리규정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본어
古代の東アジアの各国は国際交流によって、対外情報を收集․伝達した。唐の冊封体制に編制された朝鮮半島の三国(高句麗․百濟․新羅)はもちろん、封体制に編制されなかった日本も遣唐使を派遣し、公式外交を通じて対外情報を入收した。また、遣唐使とともに唐へ派遣された留學生(僧)によってもかれらが唐に滞留していた間の見聞を通じて知識と対外情報を本国に伝達した。日本を訪問する高句麗使や百濟使などの外国使節によっても直接․間接の対外情報が伝達された。もちろん、外国使節の対外情報伝達は國書による情報伝達以外にもと使節との質疑應答によっても必要な情報の入收ができた。また、‘質’という公的往來交流によっても対外情報が伝達された。
公式的な国家的交流ではないが、民間の交流を通じる情報伝達も可能だった。留學僧の場合とは逆に渡來僧による情報伝達も行われていた。
この時期の東アジアの特別な政勢による情報交流にも注目すべきだろう。百濟と高句麗の滅亡、白村江戰鬪以後、唐へ引っ張られた戰爭捕虜や逆に朝鮮半島もしくは日本へ引っ張られた唐人の情報伝達、渡來人や亡命者などの帰化人による対外情報伝達も七世紀の東アジア交流と情報伝達の特徵的な形態であろう。
八世紀に至ると対外情報の重要な收集及び伝達者であった遣唐使の帰国後の復命報告は、以前の口頭報告から文書化になるなど複雜化․定形化して‘唐消息’という対外情報を必ず報告することになった。この‘唐消息’以外には、基本的構造における大きい変化はみえない。この時期は遣唐使と渤海使、新羅使などの外国使節を通じる対外情報の收集と伝達が强化される時期であった。
しかし、個人による情報の伝達はだいぶ少なくなった。律令国家の成立によって、法制的には個人の移動が不可能になったので、漂流民의の放還や各国の風聞に対して檢討することいがいには、民間からの対外情報の收集は事実像不可能になった。すなわち、古代の東アジアの交流や対外情報のあり方について見通し、外交が大きな比重を占めるいて、東アジアの各国は対外情報の收集․伝達はもちろん、自国の情報が国外로 で流出されることを防止するために律令通じて情報管理規定も作られていた。
목차
II. 7세기 동아시아의 對外情報傳達
III. ‘唐消息’에 의한 對外情報傳達體制의 확립
IV. 情報傳達과 情報流出防止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日文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