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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 契丹 關係史 - 4세기 말기에서 6세기 후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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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與契丹的關係史 - 從4世紀末期到6世紀後期 -

고구려 · 글단 관계사 - 4세기 말기에서 6세기 후기까지 -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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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국어

이 논문은 契丹이 동몽골, 즉 遼河의 서쪽 상류인 西拉木倫河 유역에서 정치적 집단세력으로 서 史上에 등장하는 4세기 말기부터 479년 高句麗의 契丹 侵攻을 계기로 형성된 ‘勿于契丹’이 553년 北齊의 공격으 로 해체된 이후 거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高句麗와 突厥이 충돌하는 6세기 후반까지 약 200여 연간의 高句麗 와 契丹의 關係史 에 관한 고찰이다. 제1장은 契丹의 高句麗 侵入과 그에 대응한 廣開土王의 碑麗 親征에 관한 것이다. 거란과 고구 려의 관계는 378 년(小獸林王18년) 가을에 거란이 고구려의 北邊을 침입하여 8部落을 함락하고 邊境民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고구려는 391년(廣開土王元年)에 九月에 고구려가 거란을 토벌 하여 거란인 500명 과 함께 이전에 거란에게 포로로 잡혀간 1만 여 명을 데리고 귀환한다. 이 사건은 <廣開土王碑 文>에 새겨져 있는 永樂5年, 즉 395년에 廣開土王이 碑麗를 친정하여 그 부락 600~700營을 격파하고 수많은 소, 말, 양 등 가축을 전리품으로 몰고 귀환하는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서 연대가 다르게 표기되었던 것이다. 碑麗 는 5세기 중반에 형성 된 ‘契丹古八部聯盟’의 하나인 『魏書』와 『遼史』에 보이는 匹黎部로서, 『魏書』와 『通典 』에 보이는 匹黎爾部, 匹 絜部, 匹黎尒國과 동일한 세력이다. 그리고 이 세력은 『魏書』「勿吉傳」에 의하면 勿吉과 이 웃하고 있었다는 기재되 어 있는데, 필자는 이 기사를 중요 전거로 삼아서, 碑麗=匹黎尒國란 세력은 廣開土王이 征討에 나선 4세기 말경에 는 지금의 遼河의 동쪽 지류로서 吉林省 서부, 遼源 부근의 哈達嶺에서 發源하는 東遼河 유역에 서 유목생활을 영 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추론하였다. 제2장은 長壽王의 契丹 侵攻과 그로 말미암아 발생한 ‘勿于契丹’의 形成과 解體에 관한 내용이 다. 5세기 초반 부터 契丹部는 北燕 및 北魏와의 對外交易을 통하여 정치·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契丹部는 5 세기 중반 경에 이 르러 그 주변의 7部가 연맹하여 ‘契丹古八部聯盟’을 형성하였다. 이후 이 聯盟體는 北魏와의 활 발한 교역을 통해 서 더욱 세력을 신장함으로써, 당시 北魏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 었다. 한편 北魏가 439년에 華北을 통일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에 북위를 둘러싸고 동방의 高句麗, 북 방의 柔然, 서방의 吐谷渾, 남방의 南朝는 環狀的으로 연결하여 공동으로 북위에 대처하려고 하 였다. 고구려는 북 방 유목국가인 유연과의 연합을 통하여 북위를 견제함과 아울러 당시 新興한 勿吉이 고구려의 北邊을 위협하는 상 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유연과 연합하여 북위의 세력권에 들어간 거란 북 방의 地豆于를 분할 하려고 하였다. 이에 479년에 고구려 長壽王은 동몽골에 군대를 파견하여 地豆于에 이어 契丹 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契丹古八部聯盟’은 해체되고, 일부 거란 세력, 즉 族長 莫賀弗 勿于가 거느리는 약 1만 명 집단, 즉‘ 勿于契 丹’은 大陵河 동방지대, 즉 遼河 中流 西部地帶로 남하하였다. 북위는 이들을 보호하여 그 세력 권에 두고 이들을 통해서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후 契丹史는 553년에 北齊 文宣帝의 ‘勿于契丹’에 대한 親征으로 ‘勿于 契丹’이 해체될 때까지 약 70여 년 동안 遼河 중류 서부지대의‘ 勿于契丹’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3장은 6세기 후반 突厥과 高句麗의 衝突과 그에 따른 일부 契丹 세력이 돌궐의 지배를 거부하 고 고구려 영내 로 이동하여 寄託한 사건 등에 관한 고찰이다. 552년 柔然을 격멸하고 몽골리아의 새로운 覇者 로 등장한 突厥第 一可汗國(552~630)은 제3대 木汗可汗의 치세인 555~557년경에 동몽골의 契丹과 庫莫奚 등을 정복하고 遼河를 건너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돌궐군은 고구려의 新城과 白巖城을 공격 하였지만, 고구려 장군 高紇의 분전 으로 패하여 퇴각하였다. 그리고 『隋書』「突厥傳」에 기재되어 있는 隋文帝의 詔書 중에 ‘往 年에 利稽察이 高句麗 와 靺鞨에게 패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것은 돌궐군이 또다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과 전쟁 을 벌여서 패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 詔書가 작성된 시기는 582년(開皇2년, 平原王24년) 十二月이기 때 문에, 詔書 중의 ‘往 年’은 581년(開皇元년, 平原王23년)을 포함한 그 이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555~557년경에 거란의 대부분은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隋書』「契丹傳」에 의하면, 그와 함께 상당수의 거란인 들이 돌궐의 지배를 거부 하고 그 故地를 떠나서 고구려 영내로 들어가서 寄託했음을 알 수 있고, 『北齊書』「高保寧傳 」 및 『隋書』「陰壽傳」 에 의하면, 일부 거란인들은 北周가 北齊를 정복한 577년 이후에도 북제의 舊臣인 營州刺史 高 保寧을 도와서 북 주에 대항하고 있었다. 따라서 555~557년경에 거란의 대부분은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6 세기 말에 老哈河 유역에서 契丹 ‘十部聯盟’이 형성될 때까지, 거란의 일부는 그 故地를 떠나서 高句麗에 寄託하 였고, 다른 일부는 北齊 營州刺史 高寶寧과 협력하여 北周에 대항하는 등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어

本稿是從四世紀末期到六世紀後期關于高句麗與契丹 的關係史之一篇硏究論文. 第一章考察了在四世紀末期契丹侵入高句麗和高句麗 廣開土王親征契丹(碑麗). 依據三國史記, 高句麗與契丹 的交涉開始了, 從在小獸林王十八年(378年)秋季, 契丹侵 入高句麗北邊, 陷落八部落而捕捉多數的高句麗人. 以其 對應, 在廣開土王元年(391年), 高句麗討伐契丹, 捕捉契 丹人五百人, 而帶來從前契丹捕捉一萬餘高句麗人歸還 了. 把這個事件現在學界大槪認爲同一與在廣開土王碑文 被彫刻的一個事件, 就是永樂五年(395年)廣開土王親征 了碑麗的事件. 當時廣開土王擊破了其部落六百或七百 營, 而帶來了牛馬羊等畜群的, 但事件發生時機的記載是兩者不一致的. 碑麗是在五世 紀中以契丹部中心形成的‘契丹古八部聯盟’中的一個集 團, 他們就是在魏書契丹傳和遼史的‘匹黎部’, 而魏書本 紀和通典的‘匹黎爾部’·‘匹絜部’·‘匹黎尒國’. 依據 魏書勿吉傳, 他們在勿吉的傍邊, 在廣開土王征討他們的 時候的四世紀末葉(391年或395年), 他們在東遼河流域營 爲了遊牧活動的可能性很大. 第二章考察了在五世紀後半高句麗長壽王侵攻契丹和 由于這個事件在大陵河東部發生的‘勿于契丹’的形成以 及解體. 東蒙古 西剌木倫河流域的契丹部, 因爲從五世紀 初期與北燕以及北魏展開交易, 其勢力很大成長了. 到五 世紀後半, 以契丹部爲中心的其周邊的七部結成聯盟, 形 成了‘契丹古八部聯盟’. 以後契丹與北魏的關係更加密接 的. 另一方面, 在太武帝太延五年(439年), 由于北魏統一 了中國華北, 以東北亞洲的新强者登場了, 所以其周邊諸 國的高句麗·柔然·吐谷渾以及南朝(劉宋·南齊)對北魏 的侵攻担懮了. 而他們四國一起構築聯合的勢力, 要對處 北魏的威脅. 高句麗與其北方的柔然瓜分在北魏的勢力下 的地豆于, 對他們要削減北魏的威脅. 終于長壽王六十七 年(479年), 高句麗軍進擊東蒙古, 攻擊了地豆于以及其南 方的契丹, 所以契丹古八部聯盟解體了. 然而一部契丹集團, 卽以莫賀弗勿于爲首的一萬餘人集 團‘( 勿于契丹’), 南下了在現在的大陵河東部地帶. 北魏把 他們要使用對高句麗的防壁, 保護了他們. 以後到六世紀 中盤(553年)北齊文宣帝攻破‘勿于契丹’, 契丹的歷史以 ‘勿于契丹爲中心展開的. 而我判斷‘勿于契丹’的駐牧地 的大陵河東部地帶, 恐怕可能比定現在的遼河中流西部地 帶. 第三章考察了在六世紀後半突厥與高句麗的衝突, 從 而一部契丹集團拒否突厥的支配, 移動于高句麗領內而 寄託高句麗的. 在高句麗陽原王八年(552年), 突厥擊滅柔 然, 以新蒙古遊牧世界的覇者登場了. 其第三代木汗可汗 在陽原王十一年(555年)~十四年(557年)頃, 征服東蒙古 的契丹以及庫莫奚等, 終于渡遼河而侵攻了高句麗. 然而 依據三國史記, 在新城和白巖城, 以高句麗軍擊破突厥軍, 突厥不能不退却了. 而隋書突厥傳有‘往年利稽察大爲高 麗·靺鞨所破’之隋文帝的詔書, 筆者論證了, 這場突厥 軍與高句麗·靺鞨軍的衝突發生了在五八一年以前, 突厥在六世紀中葉進出東蒙古, 而大部份的契丹部落下 落了于突厥的支配. 然而依據隋書契丹傳, 在這個時候不 小的契丹人拒否突厥的支配, 而移動到高句麗的領內, 寄 託了高句麗朝廷. 另一方面, 依據北齊書高保寧傳和隋 書陰壽傳, 也有另一部契丹勢力, 他們北周征服北齊的 五七七年以後, 幇助北齊的營州刺史高保寧, 繼續抵抗北 周了. 總之, 從五五三年, 北齊文宣帝親征大陵河東方地 帶(遼河中流西部地帶)駐牧的‘勿于契丹’, 到六世紀末期, 在老哈河流域被形成的‘契丹十部聯盟’大部份失陷了于 突厥的支配下, 一部分移動于高句麗領內而寄託了于高 句麗, 另一部分形成獨自勢力, 與北齊營州刺史高保寧協 力, 而抵抗北周了.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Ⅰ. 거란의 고구려 침입과 廣開土王의碑麗 親征
 Ⅱ. 長壽王의 거란 침공과 ‘勿于契丹’의 형성과 해체
 Ⅲ. 突厥과 高句麗의 충돌과 거란일부의 고구려 寄託
 맺는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이재성 李在成. 동국대학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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