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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呂之亂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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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strophe of EO-RYEO

어려지난연구

林常薰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제39호 2011.10 pp.36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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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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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원제국시의 고려에 대한 빈번한 공녀요구와 그와 관련된 연구는 중국의 喜蕾 등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그에 비해 조선초의 공녀연구 상황은 원나라 때와 비교하여 볼 때 그 규모나 수량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러나, 그 연구 범위와 수량은 원조의 그것과 필적할 정도로 광대하고 많다. 14세기 말에 들이닥친 원명교체, 한반도에서 역시 고려와 조선의 교체, 이와 관련된 친원적 성격이 강한 고려에 대한 명의 경계 등등 이러한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명나라 황제의 조선에 대한 공녀요구 원인을 어느 학자들은 정치적인 이유 즉, 화친(和親)이라고 보지만, 필자는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명황제의 사욕,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실제로 선덕조에 그동안 명궁궐에 남아있던 공녀들을 보내면서, 섭정을 하다시피한 장황태후가 처녀들이 온 건 알고 있지만, 음식 만드는 시녀, 노래 부르는 시녀들이 들어온 건 모르고 있었다. 이로 볼 때 명황제의 조선에 대한 공녀요구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일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명황제의 이러한 무리한 요구는 조선의 군신으로 하여금 유가적 도덕관념을 위배하면서까지 처녀들을 준비해 진공하게 했다. 이 당시 조선의 왕과 양반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 역시 큰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양반, 백성들의 고충은 실제로 조공품으로 끌려가는 공녀들의 아픔에 비하면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공녀들의 중국을 향한 진공행렬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그것을 산송장(生送葬)이라고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중국궁궐에 도달한 공녀들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속으로는 항상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삶을 이어갔고, 대부분의 공녀들은 두 차례에 걸친 영락제의 대량학살로 인해 만리타향에서 원한을 품은 채 객지의 원귀가 되었다. 본 연구는 영락조에 발생한 두차례의 명 궁궐내의 대학살 궁궐비사인 ‘어려지난(魚呂之亂)’에 초점을 맞추어 그 발생시기와 주모자 등에 관한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아래와 같은 해결과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 먼저, 사건의 원흉인 呂씨에 관한 신분을 연구해 본 결과, 실제로 사건의 원흉인 呂씨는 조선의 공녀출신 呂씨가 아닌 중국 呂씨 상인의 딸인 “贾吕”로서 명궁궐에 들어온 중국인으로 조선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인물이었다. 둘째로, 본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거 의존하여 어려지난에 대해서 설명해봤는데, 정확한 발생시간 등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은 『명사』,『명실록』,『국각』등 중국사료에 약간이나마 출현하는 기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근하였고, 그 결과 영락제의 呂씨 주살은 영락11년(태종13년, 1413년)에 발생, 어려지난은 영락19년(세종3년, 1421년)에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로, 어려지난의 또다른 주모자 어(魚)씨의 신분에 관한 것으로, 그 어씨의 성이 魚가 아닌, 喩라는 것이다. 두번째 연구결과인 어려지난의 구체적 발생시간이 틀리지 않는다면, 『명사』,『명실록』,『국각』등 중국사료에 등장하는 영락제의 후궁 喩씨의 사망시간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어려지난의 발생시기에 자살한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중국어 발음에 있어서 위의 두 한자는 다 같이 ‘위’라는 발음으로 글을 쓸 줄 모르거나, 알더라도 어떤 중국어 발음 ‘위’의 한자인지 모르는 김흑이 발음하는 것을 사관이 오기했을 가능성이 커, 어려지난의 또다른 주모자 魚씨가 사실은 영락제의 후궁 喩씨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로, 사료의 활용상에 있어서의 제한이다. 본 연구의 주제인 어려지난은 명나라 황실의 비사(秘史)로서, 공녀에 대한 기록과 마찬가지로 중국측 사료에서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내용이며, 실제로 영락제 가붕후 즉위한 명 인종은 이 일을 조선에 알리기를 매우 꺼려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조선왕조실록』에 대거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둘째로, 위와 같은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에만 의존하여 사료의 진위성 여부에 대한 신빙성이 낮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일부러 거짓된 내용을 기록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기록에 있어서 과장과 오기 등 문제가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어려지난은 영락19년(세종3년, 1421년)에 발생하였고, 한씨의 유모인 김흑은 선덕10년(세종17년, 1435년)에야 비로서 조선에 돌아와 어려지난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 알렸다. 즉, 사건 발생 후 장장 15년이 지난 후에야 조선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역시 연로한 김흑이 당시 상황을 되새기며 구술한 것을 다시 사관이 옆에서 받아 적은 것으로, 앞서 말한 과장, 오기 등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 예로 앞서 설명한 “鱼”씨와 “喻”씨의 오기를 들 수가 있겠다. 셋째로, 본문에서는 필자 역량의 한계로, 어려지난의 원흉인 “贾吕”가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 呂씨 상인의 딸이 궁녀로 들어온 것으로 설명하는 데 끝은 맺고 말았다. 그녀의 정확한 신분을 파헤치는 것이 본 연구의 가치를 한 단계 승격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나, 필자의 한계로 후속연구과제로 넘기게 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목차

I. 研究回顾
 II. 明初朝鲜进贡贡女的情况
 III. 鱼吕之乱
 IV. 鱼吕之乱的一些问题
  1.鱼吕之虱的关键人物‘吕氏"的真实身份
  2. 鱼吕之乱的发生时间
  3. "鱼氏"的真实身份
 V . 结语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林常薰 임상훈. 南京大学历史系古代史制帽士鹏也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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