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한국어
한반도에서 「논어」는 7세기 후반부터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자학 도입이전(13세기)까지 「논어」는 군왕이나 학자들의 자질과 생활규범의 확립에 필수불가결한 경전이기는 하였지만 학문적 입장에서 심층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주자학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16세기 후반에는 이황과 이이의 「논어석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석의」는 경문 전체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었고 의난처(疑難處)를 적출하여 언해를 붙이는 방식으로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이어 이덕홍의 「논어질의」는 의난처를 적출하여 주희주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밝힘으로서 「논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방향은 하나의 전통을 이루어 김장생의 「논어변의」, 김수인의 「논어차록」, 박지계의 「논어차록」, 이유태의 「논어답문」으로 이어지면서, 주희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결코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 견해를 표출하면서 공자의 본의를 밝히려고 하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하는 송시열의 「논어혹문정의통고」가 편수되는 한편 탈주자적 경향의 임영의 「논어차록」이 나오고 마침내는 반주자적 경향인 박세당의 「논어사변록」이 이루어진다. 「통고」와 「사변록」이 동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조선조 전기의「논어」연구가 결코 주자학 일변도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어
在韩半岛《论语》是从七世纪后期开始被传开的。截止到十三世纪朱子学传入,《论语》虽然是个君王以及学者确立素养及生活规范方面不可或缺的经典,但从学术角度未进行深入探讨。随着十六世纪朱子学研究的深入,十六世纪后期出现了李滉和李珥的《论语释疑》。不过《释疑》并不是对经文全文的注解书,它以采取摘出疑难处附加言解的方式,寻求原文的正确的含义。 继后,李德弘的《论语质疑》以摘出疑难处讲明对朱熹注的自己的解释的方式,为《论语》的正确理解提供了方向。这种研究方向形成一种传统,其后相继出现金長生的《论语辯疑》,金守訒的《论语箚录》,朴知誡的《论语箚录》,李惟泰的《论语答问》,他们都以朱熹注为基础,但不拘泥于此,各发表各自独到的见解的方式来释解孔子的本意。 十七世纪后期出现了朱子学的信奉者宋時烈的《论语通攷》,也出现了带有偏离朱子倾向的林泳的《论语箚录》,最后出现了反朱子倾向的朴世堂的《论语思辨录》。《通攷》和《思辨录》的同期出现意味着在朝鲜朝前期的论语研究并不仅仅是朱子学一边倒。
목차
1. 머리말
2. 조선조 이전의 『논어』 연구
가. 통일신라기의 『논어』 연구
나. 고려시대의 『논어』 연구
3. 조선조 전기(16-17세기)의 『논어』 연구
가. 경서의 구결과 언해
나. 이황과 이이의 『석의』
다. 이덕홍의 『논어질의』
라. 김장생의 『논어변의』
마. 김수인의 『논어차록』
바. 박지계의 『논어차록』
사. 이유태의 『논어문답』
아. 송시열의 『통고』
자. 박세당의 『사변록』
차. 임영의 『차록』
4. 맺음말
참고문헌
要約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