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일반논문

국채보상운동과 한국 개신교계

원문정보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nd Korean Protestants

한규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26집 2011.06 pp.43-74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영어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nd Korean Protestants Han, Kyu Moo This study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Korean Protestants' participation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nd its character in 1907. In the 1900s, Korean Protestants had various conditions favorable to the movement. Total 98 cases of their participation in the movement were found in all sorts of newspapers. While its number was bigger than other religious communities, it was small compared to their religious influence. In particular, huge significance is found in the fact that the stations in Seoul and Pyeongyang were not actively involved in the movement, which may have been influenced by the nonpolitical line declared by the missionaries in the 1900s and the Great Revival Movement that was initiated in Pyeongyang in 1907 and spread across the nation. In conclusion, Korean Protestants whose two major pillars were the Presbyterian and Methodist Church did not take active part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hich can be a criterion based on which to newly interpret and assess the national movements of Protestants in the 1900s.

한국어

국채보상운동과 한국 개신교계 한 규 무 이 글은 1907년 개신교계의 국채보상운동 참여와 그 성격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900년대 개신교계는 국채보상운동에 유리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⑴ 모금의 주요방법인 ‘단연(斷烟)’이 청도교적 생활윤리를 강조한 한국교회의 특성과 맞았다. ⑵ 국채보상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했는데, 기독교 여성들은 일찍부터 활발한 사회운동을 벌였으며 많은 교회에 부인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⑶ 189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각종 계몽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⑷ 교회라는 체계적ㆍ전국적 조직은 운동의 전개를 위해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⑸ 1900년대 계몽운동의 중심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설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신교계 국채보상운동은 부진했다고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짐작된다: ⑴ 교회 지도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정치적 성격의 것으로 간주하여 참여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⑵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국채보상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⑶ 기독교 계몽운동의 중심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도 ‘비정치화’ 노선으로 기울었다. 개신교계가 국채보상운동 참여에 적극적이었느냐 소극적이었느냐는 평자의 관점과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필자는 교세에 비해서는 부진했고 타종교계에 비해서는 활발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서울ㆍ평양을 비롯하여 선교거점인 스테이션들에서 참여가 미약했던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교회 안에서 정치적 성격의 집회를 갖거나 교회의 명의로 정치적 성격의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찬반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안이며, 그같은 성격이 분명했다면 선교사들이 이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황실과 관리들도 참여하고 전국각지의 각계각층이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이, 과연 선교사들이 걱정할 정도의 정치적 성격의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선교사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비판적이었다는 직접적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그들이 앞장서 교인들을 동원하여 행사를 주최하며 ‘충군애국’을 강조했던 1890년대 개신교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장로교ㆍ감리교를 양대산맥으로 하는 한국 개신교계의 국채보상운동의 참여는 활발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은, 1900년대 개신교계의 민족운동을 새롭게 해석ㆍ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목차

I. 머리말
 II. 선행연구 및 관련자료 검토
 III. 개신교계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IV. 개신교계 국채보상운동의 성격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한규무 Han, Kyu Moo. 광주대학교 관광학과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 7,300원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