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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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갈리칸 지역에 있는 산티아고는 예루살렘과 로마와 함께 중세 3대 성지중의 하나다. 이중 가장 늦게 생긴 것이 콤포스텔라의 산티아고인데, 이곳은 사도중의 하나인 성 야곱에게 봉헌된 곳이다. 이곳은 11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순례객들을 매료시켰는데, 이때가 십자군과 도시들이 전개된 때이다. 1085년 세계지도(mappa mundi)에 따르면 콤포스텔라는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땅의 끝을 뜻했다. 동시에 삶과 죽음, 영혼과 신체를 이어주는 거룩한 중심이었다. 콤포스텔라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이어주는 거룩한 곳이었다. 13세기 제노바 주교 야코부스(Yacobus de Voragine)도 콤포스텔라에서 일어난 많은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순례의 주요 동기들은 영적인 구원과 세속적인 혜택이었다. 순례는 순례자들이 그리스도가 행한 길고 어려운 여행을 재 경험하는 것이다. 순례는 개종을 의미했고, 개종한 순례객들에게는 질병의 치료에서 기적과 전쟁에서 승리 같은 것들이 부여되었다. 스페인 북부가 이슬람에 대항하는 중요한 전진기지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야곱의 이야기는 이슬람 세력에 반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의 70%가 남성이고, 30%가 여성이었다. 여성순례는 일상적인 집안일로부터 해방을 의미했다. 나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빈약하지만, 19세기 산티아고 자료를 근거로 할 때, 평균나이는 45세였고, 대부분 40-60세였다. 순례자들의 직업은 왕과 귀족에서 병자와 빈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검소한 거주지나 병원들은 일반인들이 사용하고, 귀족들과 왕들은 성채 등을 사용했다. 순례를 떠날 때는 유언장을 만들거나 자선을 행했다. 그리고 교구교회 미사에 참석하여 지팡이와 여행도구에 축복을 받고 순례를 증언하는 확인서를 받기도 했다. 순례 길을 떠날 즈음에는 가족과 친척들은 동네 어귀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순례자들의 의복은 성에 따라 달랐다. 남성은 짙은 갈색 옷, 바지, 모자, 신발, 여성은 바지 대신에 스커트를 입었다. 순례에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면, 일가친척 등과 함께 기존사회에 편입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 의식을 통해 순례자들이 개종자로 존경을 받고, 사람들은 이들의 의복과 몸을 만지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된 성 야곱 형제단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 단체로 잘 알려져 있다.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구간에 빈자들과 약자와 병자들을 위한 많은 자선기관들이 있었다. 자선기관으로는 교회와 수도원이 중요한 공헌을 했다. 14세기 이후, 궁정기관들과 시, 형제단들이 이러한 사역에 동참했다. 각종 구제와 호스피스 기관은 영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유지되고, 또한 사회적인 위상과 권력을 위해 작용한 점도 많았다.
목차
II. 이념형적 '중세도시' 개념의 발생사
III. '서양 중세 도시' 개념의 본질적인 문제들
1. '도시공동체'
2. '코뮌'
3. 'Homo oeconomicus'
IV. '서양 중세 도시' 개념과 코뮌 연구
V. 결론
< Abstract>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