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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습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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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고산면 율곡리에서 좌측으로 2km 쯤 가면 고려국 완산백 습(濕)의 제각인 시사재(時思齋)가 있고 그 뒤에 묘소가 있다. 이 유습 신도비는 묘역 내에 묘비와 함께 있으며 문관과 무관석 그리고 석등이 있고 묘역 아래 시사재 앞에 하마비도 갖추어 있다
이 신도비는 방형대석(方形臺石)에 옥개형(屋盖形) 개석이 갖춰져 있으며 1868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유희구가 짓고 남희규가 행서의 필의를 가미한 해서로 썼으며 두전은 소학규가 썼다. 원래 구 비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유습은 고려 충축왕 때(131 이 전주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부인 최씨는 슬하에 다섯 아들과 한 사위가 문과
에 급제 하여 삼한국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묘갈에는 세 아들은 문과요 두 아들은 사마(司馬) · 진사 · 생원이라 하였으니 문과나 사마가 모두 고려 때 과거라서 지금 고증하기는 어려움이 많으나 장남 극감은 판사둘째 극서는 직제학,셋째 극수는 판서, 넷째 극제는 판관, 막내 국기는 판서에, 사위 심효생은 대제학이었다. 01로써 유습은 장령에서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추증되고 또한 완산백(完山伯)에 추봉되었으며 부인은 삼한 국대부인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공민왕 시절 이곳에 와서 살게되었으며 평생 근신하면서 벼슬 없는 선비로 살았다.
그의 후손들은 전국에 분포되어 살면서 사회지도층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으며 학교법인 시사학원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저자정보

  • 전라금석문연구회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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