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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개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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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송광사 개칭비는 송광사 경내 뒤편 밭 가운데 서있다. 비신에 비해 작은 편이고 조각기법도 정교하지 않은 거북좌대 위에 2.5m에 이르는 거대한 비신이 이수와 한몸으로 조각되어 세워졌다. 건립 연대는 인조 14년(1636)이다.
비문은 선조임금의 사위며 문장과 글씨로 당대 명성을 떨쳤던 신익성이 짓고 선조의 아들로 해서에 능한 의창군 이광이 썼다.
송광사는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맛을 보게 되었는데 다른 우물의 물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영천의 주위를 돌로 쌓아둔 채 순천 송광사에 가서 조계종을 장사한 뒤 제자들에게 전주 종남산에 절터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과 그 곳에 절을 세우면 반드시 번창하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보면 보조국사가 죽은 뒤 오래토록 그의 뜻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는데 조선조 광해군 14년 (1622)에 이르러 당시 이 지방에 거주하던 승려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보조국사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때 무주 적상산 안국사 주지 벽암대사(碧岩大師)를 모셔 개창조(開創祖)로 하고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수천 명의 신도가 모였다고 한다. 사찰의 이름은 보조국사의 뜻에 따라 종남산 송광사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광사는 병자호란에 참여한 승병들이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를 근거할 만한 지명으로 馬水里(말에 물을 먹였던 마을) 馬水橋(말에 물을 먹인 마을 앞 다리)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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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라금석문연구회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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