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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저널리스트들의 논쟁 - 민족주의 · 반유대주의와 정의 ·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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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bates of journalists on Dreyfus Affair

임종권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25집 2010.12 pp.35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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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article analyzes arguments about The Dreyfus affair developed between Journalists. After Affair broke out, in France, Dreyfusard who claimed new retrial of Dreyfus, believing confidently fully that Dreyfus was not guilt, on the other side, The Nationalist and Anti-Semitists who had put great stress on the army and country, being confident of Dreyfus’s guilty, these had a heated dispute about the affair each other through the journals. Dreyfusard claimed that the justice and truth were more important than the security of country and the faith of army. So, by mobilizing the intellectuals, they had insisted on Dreyfus’s innocence. On the other hand, against these, appealing a patriotic sentiment to the people, Anti-Dreyfusard had inspired the nationalism ideology with Anti-semitism, the xenophobia and the protection of army. By that these opinions were spread through the journals, the Dreyfus affair became the national interest on nationwide scale. These disputes that divided France into two parts set what should be the base of political ideology in the third Republic. Thus, Dreyfusard and Anti-dreyfusard who struggled and combined against each other in accordance with different political opinions, show an aspect of political struggle. After all, the Dreyfus affair is a product of impact by the flows of Nationalist, Anti-semitism and the authoritarianism of Republican system. Anti-Dreyfusard realized a necessity to be shown the Movement of Anti-Dreyfus just as a cause of Dreyfus guilty, the legal political order, and the social vision. Zola’s shock article, 「J’accuse」 gave rise to the fever of various opinions on the Dreyfus affair. This caused Anti-Dreyfusard to be a majority party in the parliamentary elections on May, 1898. The nationalism excited by Anti-semitism journals was violently expressed at last, Then, Zola was attacked by stones at the place near to his house on 10, April. Rochefort announced that the retrials of Dreyfus would be the end of France in 󰡔l’Intransigeant󰡕 on May 1, 1898. The people firmly believed Dreyfus’ guilty. Thus, nationalist and Anti-semitist made good use of this mood. Between 1894 and 1898, Anti-Dreyfusard succeeded in stiffening the affair into an ideological organization to stop all retrial of Dreyfus relative to all suits of 1894, Dreyfus’ guilty or not guilty. Anti-Dreyfusard could get strong supports from people toward simple and holy doctrine of army, nation, the authority, and so on. And they wanted to make a political force and authority to overcome own political division, theoretical contradictoriness, and weakness in number. They blamed Dreyfusard, because these supported the intellectual movement for all political forces who had represented themselves, besides the open of society, and grant the Republic citizenship to Dreyfus. Moderate Anti-Dreyfusard and Anti-Dreyfusard among all the republic parties, Anti-Dreyfusard from the bottom of heart and Anti-Dreyfusard who was anxious of only order in the army and society, all of these were regarded in the same light as Anti-semitism and a extreme rightists. But the expression like this is merely a admiration of nation that a certain person has asserted the French homogeneity to be incompatible with foreign presence after the individualism is over. Therefore, The nationalism means the unexpected explosion of anti-semitism. Although Dreyfusard contributed to Anti-Dreyfusard’s political defeat, but they did not play an important role in this result. After all, since anti-Dreyfusars defeated, the hope of Dreyfusard for Dreyfus, a change of the nationalism, the end of crisis of citizen’ liberty, and ‘Dreyfusard France’ in favor of Dreyfus on the ground that it symbolizes the entry into the 「La Bell Epoque」 and so on, so to speak, the anti-Dreyfusard’s political defeat was a overall results of these.

한국어

이 논문은 드레퓌스 사건에서 저널리스트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을 분석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한 이후 프랑스는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확신하고 재심을 요구하고 나선 드레퓌스파와 군대와 국가를 중시하며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했던 민족주의자와 반유대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드레퓌스파는 국가의 안보와 군대의 신뢰성보다 정의와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소위 「지식인」을 결집하여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와 반면 반드레퓌파인 민족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며 군대를 보호하고 반유대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동반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켜나갔다. 이러한 의견은 사건 처음부터 신문을 통해 발표되면서 이 논쟁은 전국적인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프랑스 둘로 나눠지게 한 이 논쟁은 각자 제3공화국의 정치적인 이념의 토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따라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 등 이들 두 진영의 가담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각기 다른 정치적 견해에 따라 서로 결집하고 대결했던 투쟁의 양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공화파 체제에 대한 권위주의 흐름의 충격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레퓌스파는 드레퓌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드레퓌스 유죄에 대한 진실로서, 합법적인 정치 질서로서, 그리고 사회의 비전으로서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졸라의 충격적인 기사 「나는 고발 한다」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열기를 높여 놓은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반드레퓌스파들은 189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여 국회 다수파가 되었다. 반유대주의 신문에 의해 뜨겁게 격앙된 민족주의는 폭력으로 표출되어 4월 10일 졸라는 그가 거주하고 있는 멀지 않은 곳에서 돌로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로슈포르는 1898년 5월 1일 자 󰡔렝트랑지장󰡕에서 “드레퓌스 소송의 재심은 프랑스의 종말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의 유죄를 확신했고 반유대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국내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을 할 수 있었다. 1894년과 1898년 사이 반드레퓌스파들은 드레퓌스가 유죄든 아니든 간에 1894년 소송에 대한 모든 재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드레퓌스 사건을 이념적인 체계로 경직시키는데 성공을 했던 것이다. 반드레퓌스파들은 군대, 민족, 권위 등 단순하고 신성한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고 자신들의 정치적 분열, 이론적인 모순성, 수적인 취약함 등을 극복할 있는 권력과 정치세력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들은 드레퓌스파들을 규탄한 것은 이들이 드레퓌스에게 공화국 시민권 부여, 사회의 개방, 자신의 세력들을 위한 지식인 운동 등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공화파 가운데 온건한 반드레퓌스파와 극단적인 반드레퓌스파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드레퓌스파, 또한 단지 사회와 군대의 질서만을 염려한 반드레퓌스파들. 이들 모두는 반유대주의 극우파와 동일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개인주의 시대가 끝난 이후 프랑스인의 동질성은 외국인들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는 민족 예찬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급작스런 반유태주의의 폭발을 의미한다. 드레퓌스파들은 이러한 반드레퓌스파들의 정치적 패배에 기여를 했지만 그러나 이들은 이 결과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반드레퓌스파의 정치적 패배는 드레퓌스를 위한 드레퓌스주의자의 바람, 민족주의 경향의 변화, 시민의 자유가 맞이했던 위기의 종말, 그리고 「좋은 시절」(La Bell Epoque)로의 진입을 의미한다는 이유에서 드레퓌스에 호의적인 ‘드레퓌스파 프랑스’ 등, 이 모든 총체적인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목차

I. 머리말
 II. 여론재판의 시작
 III. 반드레퓌스파 신문과 지식인
 IV. 두 진영의 저널리스트들
 V. 반드레퓌스파와 민족주의
 VI. 맺음말-사건의 의미
 참고문헌
 Abstract
 Resum

저자정보

  • 임종권 Lim, Jong Gwon. 숭실대학교 사학과 강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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