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명 경태 원년(景泰元年, 1450) 한림원 시강(侍講)인 예겸(倪謙)과 형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정사와 부사로 조선에 온 것이 “환관외교”에서 “사림외교”로 전환된 시발점이 되었다. 아울러 이로써 183년에 걸쳐 편찬된 《황화집(皇华集)》이 탄생하게 되었다. 예겸은 조선에 와서 경제의 등극조서를 전하고, ‘토목지변’에 대해 해명하고,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개선하고, 토목지변으로 실추된 명나라의 위신을 다시 세우며 조선의 예약제도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예겸과 조선의 원접사 정인지 (鄭麟趾) 및 종사관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은 춘추시대의 독특한 외교의례인 ‘향연부시(享宴賦詩)’의 전통을 계승하여 창화(唱和), 부시언지(賦詩言志), 부시관지(賦詩觀志)하였다. 이들은 시문을 통해 고대 기자(箕子)가 조선에 팔조금법을 전한 것과 현재 황제의 은총을 칭송하였는데 이는 한중 양국의 관계가 고대와 같이 친밀하게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바람에서였다. 예겸과 조선 문사가 창화한 시문은 당시에는 간행되지 않다가 성화(成化) 4년(1468)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경오황화집(庚午皇华集)》으로 간행되었다. 조선 영조는 1773년 전란 등으로 인해 소실된 《황화집》을 중간하였는데 이때 경태 원년(1450) 예겸이 사신으로 조선에 다녀간 이후 간행된 《경오황화집》이 현재의 《황화집》 1책이 되었다. 예겸이 본국에 돌아간 후 편찬한 《조선기사(朝鲜紀事)》, 《요해편(遼海編)》 등에는 사신으로 조선에 가는 과정 및 조선 문사의 창화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그는 조선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동안 언행과 시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대국으로써 명나라의 존엄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의례 규범을 존중하였다. 이 외에도 외교상에 있어서의 덕행과 그의 작품은 이후 사신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본고는 예겸의 생평과 작품, 예겸이 조선에 사신으로 간 시기의 역사적 배경, 예겸 일행의 노선과 여정, 및 《경오황화집》의 편찬시기와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예겸이 사신으로 조선에 간 의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아울러 본고가 한중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중국어
明景泰元年(1450), 翰林院侍講倪謙與刑科給事中司馬恂作爲正、 副使出使朝鮮, 這是兩國由“宦官外交”轉向“詞林外交”的開始, 並直接促成了歷時一百八十三年編纂之久的朝鮮《皇華集》的誕生。 倪謙在朝鮮宣示景帝登極詔書, 解釋“土木之變”, 並協助完善朝鮮迎詔禮制, 改善了明朝與朝鮮的關係, 重振了明王朝的威信, 成功地完成了出使任務。 其後, 倪謙與朝鮮方面擔任遠接使和館伴的鄭麟趾、 成三問、 申叔舟等人承繼春秋時期獨特的外交禮儀——“享宴賦詩”的傳統, 互相唱和, 賦詩言志, 賦詩觀志, 展示了他身為“詞林”應有的文學修養, 以古之箕子八條教化之澤與今之皇恩浩蕩, 引導兩國關係朝更好的方向發展。 倪謙與朝鮮文士唱和的詩文當時並未刊行, 至成化四年(1468) 以後才編成《庚午皇華集》。 1773年, 朝鮮英祖重刊《皇華集》時, 即以景泰元年(1450) 倪謙出使朝鮮回國後所刊之《庚午皇華集》作爲目前所見《皇華集》的第一部。倪謙回國以後, 編纂有《朝鮮紀事》、 《遼海編》等, 記錄了本次出使朝鮮的過程以及與朝鮮文士的唱和情況。 他在與朝鮮的外交過程中以自己的言行和詩文贏得了應有的聲譽, 不僅維護了明朝作為大國的尊嚴, 也尊重朝鮮方面的禮儀規範, 其外交德行和作品成為後來出使者的典範。本文綜合考察了倪謙的生平與著作, 倪謙出使朝鮮時的歷史背景, 倪謙一行出使朝鮮的路線與行程, 以及《庚午皇華集》的結集時間和內容, 幷分析了倪謙本次出使朝鮮的意義。 可供研究中韓文化交流史者進行參考。
목차
II. 倪謙的生平與著述
III. 倪謙出使朝鮮的歷史背景
IV. 倪謙出使朝鮮的路線與行程
V. 倪謙在出朝鮮其間的外交活動
VI. 倪謙出使朝鮮的意義
VII. 結語
參考文獻
中文摘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