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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學問과 思想

원문정보

A Study on Geumjae Choi Byung-Shim's Learning and Thought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학문과 사상

李相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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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Geumje(欽齋) Choi, Byungshim(崔秉心;1874~1957),the representative confucianist of literary men from Honam region in Ganje school, is recently attracting public attention as a 'Hanok village Samje(三齋)' of Jeonju. Here, I would like to look over Geumje's life, studies and ideas about his era. In terms of his pen name 'Geumje', He told himself as 'Geum' which was the previous
sound of 'Heum' to make it a symbol of pride. Because of that, people around him called him 'Geumje' instead of 'Heumje' and I call him 'Geumje' as well in this paper. Geumje eestablished his academic willingness by studying under Ganje(艮齋) Jeonwoo(田;1841~1922) and Ganje's Neo-Confucianism can be summed up into Seongsashimje theory(性師心弟說). The proposition of Seongsashimje raised more practical objection on other propositions such as Shimbonseong(心本性) and Seongcheshimyong(性體心用) that he regarded as tenets of his studies. Jo, Jangseob(趙章燮), the pupil of Yeonje(淵齋) Song, Byungseon(宋秉璿) wrote 「 Seongsashimjebyun(性師心弟辨)」 against Sungsashimje of Ganje to criticize Ganje's theory on every clauses. After that, Ganje recriticized Jo, Jangseob's opinion by writing 「Seongsashimjebyunbyun(性師心弟辨辨)」 directly on every clauses as well. Geumje also criticized Jo, Jangseob by writing 「 Seongsashimjebyunbyun(性師心弟辨辨)」 and ongsashimjejebyuni(性師心弟再辨二)」 as his mentor did. From Geumje's two papers, we can notice how deeply he understood about Ganje's 'Seongsashimje theory' and how he inherited Ganje's studies faithfully. Geumje founded Okryujeongsa in Jeonju and got a reputation by producing plenty of pupils. Among the records of Geumje and his pupils, records about
Anti-Japanese movement are remarkable as well as those about Neo-Confucianism. Geumje's Anti-Japanese conscious -ness is clearly seen from some events such as ImjaDongmil- Mengdan, Hanjeeen ccident, and YeomjeYarok Abstractn ccident. It is said that he ceen chave been cknowledged not eee cofrompupil of Ganje but also ofromrevered confucianist representing
Honam regiongdais Anti-Japanese consciousness wofrodmitted by the geomjnment. Thanks to that, he was recorded as an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and received benefits as a person of national merits. The government awarded a medal to him for his contribution to the establishment of the country on 15th of August, 1990.

한국어

欽齋崔秉心(1874~1957)은 간재학파의 호남 문인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최근 전주의 최근 전주의 ‘한옥마을 三齋’라고 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인물이다. 본 글에서는 이 금재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시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금재라는 호는 금재 스스로 ‘흠’자의 옛날 음인 ‘금’으로 불러 자부심의 표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흠재’가 아닌 ‘금재’라고 불렀고, 본 논문에서도 ‘금재’라고 부른다. 최병심(字;敬存)은 1874년(고종 11년) 10월 5일 전주 校洞(현 한옥마을 일원)에서 아버지 碧溪崔宇洪과 어머니 利川徐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여기서 1957년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냈으며, 유학자로서의 높은 명성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최학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금재는 자신의 학문적 다짐을 艮齋田愚(1841~1922)를 사사하면서 더욱 다지게 되는데, 간재의 성리설은 性師心弟說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성사심제의 명제는 그가 종지로 삼았던 心本性․性體心用등의 명제를 더욱 실질적인 의미로 제기한 것이다. 淵齋宋秉璿문하인 趙章燮은 간재의 ‘성사심제’에 대해 「性師心弟辨」을 지어 간재의 이론을 조목별로 변박하였는데, 이에 대해 간재가 직접 「性師心弟辨辨」을 지어 조장섭의 비판을 조목조목 재반박하였고, 금재 역시 「性師心弟辨辨」과 「性師心弟再辨二」를 지어 조장섭을 조목별로 비판하고 있다. 금재의 이 두 글에서는
간재의 ‘성사심제설’에 대한 이해 깊이가 어떤지를 여실히 볼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간재학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간재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은 금재 역시 열강제국의 침략에 따른
국난 속에서 자신의 거취를 은둔 강학의 행로로 정하고 간재와 같은 길을 걸었다. 금재는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강학하고 교육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금재는 전주에 옥류정사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명성을 얻었다. 금재의 기록을 보면 간재의 문인들 가운데 성리설뿐만 아니라 항일기록이 두드러지고 있다. 금재의 항일의식은 임자동밀맹단, 한전 사건, 염재야록 서문 사건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간재의 문하에서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추앙받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항일사상은 마침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국가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금재의 공로를 기려 그에게‘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가계와 생애
 Ⅲ. 艮齋學의 계승과 心說변론
 Ⅳ. 修道自靖과 抗日義理論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李相昊 이상호. 대구한의대학교 중어중국학부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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